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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흥망성쇠 (기원전 6세기 ~ 기원전 4세기)

OPYEB 2024.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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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흥망성쇠 (기원전 6세기 ~ 기원전 4세기)


1. 페르시아 제국의 성립과 키루스 2세

- 페르시아의 기원과 파르티아 지역:
    - 페르시아족의 기원은 기원전 1000년경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서 이주해온 아리아인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 이들은 이란고원 남부의 파르스 지방에 정착하며 할족 연맹체를 형성하게 되는데, 바로 여기에서 페르시아라는 명칭이 유래했죠.
    - 초기에는 메디아족의 지배를 받았으나, 점차 세력을 키워가며 독자적인 발전을 모색했습니다.  
- 키루스 2세와 제국의 건설:
    - 기원전 6세기 중엽,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 키루스 2세가 등장하면서 페르시아의 역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습니다.
    - 그는 메디아를 비롯한 주변 부족들을 하나씩 정복하고 통합하면서, 독자적인 제국 건설의 기초를 다졌죠.
    - 기원전 539년에는 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지배권을 확장했습니다. 고대 오리엔트 세계의 새로운 패권국으로 급부상한 것이죠.
- 관용적 정복왕의 이미지:
    - 키루스 2세는 정복지 주민들에게 관용적인 태도를 견지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 바빌론 점령 당시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하고,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고국으로 돌려보낸 것이 대표적 사례죠.
    -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 이념인 관용정책의 시초를 보여준 셈입니다.



2. 다리우스 1세와 제국의 전성기

- 다리우스 1세의 즉위와 영토 확장:
    - 키루스 2세의 후계자들 사이에 왕위 다툼이 일어나던 기원전 522년, 다리우스 1세가 등장해 왕좌를 차지했습니다.
    - 다리우스는 반란을 진압하고 왕권을 안정시킨 뒤, 본격적인 정복 활동에 나섰죠.
    - 그는 서쪽으로는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를, 동쪽으로는 인더스강 유역까지 진출하며 제국 영토를 크게 확장했습니다.
- '왕의 눈'과 행정 제도 정비:  
    - 제국의 안정적 통치를 위해 다리우스 1세는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정비했습니다.
    - 속주에는 총독을 파견하고, 감찰관인 '왕의 눈'을 보내 이들을 감시하고 견제했죠.
    - 왕실 전용 도로인 '왕의 길'을 건설해 빠른 연락과 물자 수송이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 조세제도 개혁과 화폐 제도 수립:
    - 다리우스 1세는 공정한 조세제도 확립에도 힘썼습니다. 속주의 경제력을 고려해 차등적으로 세금을 부과한 것이죠.
    - 또한 다릭이라는 금화를 발행하고 화폐경제의 틀을 마련했습니다. 이는 제국 내 상업 발달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 조세제도 개혁과 화폐경제 도입은 막대한 국가 재정을 확보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3.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과 제국의 쇠퇴

- 다리우스 1세의 대 그리스 원정:
    - 페르시아의 팽창에 위기감을 느낀 그리스 폴리스들은 반페르시아 동맹을 결성하고 저항에 나섰습니다.
    - 기원전 492년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 원정을 단행했지만 죽음을 맞이하게 되죠.
    - 후계자인 크세륵세스 1세가 이어받은 원정군은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대패하며 고배를 마셨습니다.
- 그리스의 역습과 페르시아의 위기:
    - 전쟁의 패배로 제국의 대외적 위신은 크게 추락했고, 속주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 반면 전승국 그리스는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고 페르시아에 맞선 반격을 계속 이어갔죠.
    - 그리스의 역습으로 인해 페르시아는 점차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제국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의 등장:  
    -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는 그리스 폴리스들을 통합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페르시아 원정을 계획했습니다.
    - 필리포스 2세의 뒤를 이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34년 3만 3천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아시아로 진격했죠.
    - 그라니쿠스 전투와 이수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알렉산드로스군은 페르시아 제국의 심장부인 수사까지 함락하며 승승장구했습니다.



4.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과 제국의 멸망

-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활동과 제국 해체:
    - 페르시아를 병합한 알렉산드로스는 동방으로의 원정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 그는 파르타, 박트리아 등 중앙아시아 전역을 장악한 데 이어 인더스강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죠.
    -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는 마케도니아 왕국에 완전히 병합되었고, 2세기에 걸친 제국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 헬레니즘 문화의 발흥:
    -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은 그리스 문화와 페르시아 문화의 융합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페르시아 전역으로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가 전파되었고, 현지의 토착문화와 만나 독특한 헬레니즘 문화를 꽃피웠죠.
    - 비록 제국은 멸망했지만 페르시아 문화는 헬레니즘 세계 속에서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 페르시아의 재건과 사산조 페르시아:
    - 알렉산드로스 사후 파르티아의 아르사케스 왕조가 들어서며 이란고원 일대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습니다.
    - 파르티아는 로마와의 대결 속 세력을 유지하다 사산조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하게 되죠.
    - 사산조 페르시아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계승을 자처하며, 중세 이슬람 세력에 맞선 최후의 보루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결론: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은 고대 오리엔트 세계 최후의 패권국이자 최초의 대제국이었습니다. 초원길을 따라 이동해온 유목민이 광대한 제국을 건설한 대표 사례로 꼽히는 페르시아 제국. 이는 유라시아 대륙 동서 문명의 교류를 심화시킨 문명사적 가교였다는 의의를 지닙니다.  
그 중심에는 관용과 포용의 통치 이념이 있었습니다. 키루스 대왕과 다리우스 1세로 대표되는 페르시아 제국 전성기의 왕들은 피정복민에 대한 자비로운 정책을 펼쳤습니다. 압제와 동화보다는 현지 관습을 존중하고 종교적 자유를 허용한 것이죠. 페르시아 제국의 오랜 지속력이 이를 통해 담보될 수 있었던 셈입니다.
물론 그리스와의 대결 과정에서 드러난 한계도 분명 존재합니다. 군사적 열세와 더불어 내부 분열의 조짐 또한 제국 쇠퇴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페르시아가 남긴 제국 통치의 모델은 인류 역사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수립, 화폐경제의 기틀, 혼합문화의 토대 등은 이후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편적 통치 규범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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