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독립전쟁과 신생 공화국의 수립 (1775년 ~ 1787년)
1. 영국의 식민 정책과 북미 식민지의 반발
- 7년 전쟁 이후 영국의 중상주의 정책 강화:
- 영국은 프랑스와의 7년 전쟁(1756-1763)에서 승리하여 캐나다와 루이지애나 동부 지역을 획득하는 등 북미 식민지에서의 지배권을 확고히 했습니다.
-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재정 부담이 가중되자, 식민지를 상대로 중상주의 정책을 강화하기 시작했죠.
- 설탕법(1764), 인지세법(1765), 타운센드법(1767) 등을 연이어 제정하며 식민지 교역에 대한 통제와 세금 부과를 확대했습니다.
-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원칙의 제기:
- 식민지 주민들은 본국의 일방적인 과세 강요에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특히 인지세법에 대해서는 격렬한 저항 운동이 벌어졌죠.
- 그들은 과세에 대한 동의권이 없는 상황에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대표 없이 과세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는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 영국 의회에 식민지 대표를 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인 셈이죠. 이는 자치와 독립의 싹을 틔우는 맹아적 요구였습니다.
- 보스턴 차 사건과 강경책으로의 선회:
- 1770년 보스턴 대학살 사건으로 식민지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영국 의회는 타운센드법 대부분을 폐지하는 등 유화적 입장을 보였습니다.
- 그러나 곧이어 차에 관세를 부과하는 조치를 단행하자, 1773년 12월 식민지 주민들은 영국 동인도회사의 차를 바다에 던지는 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켰죠.
- 이에 격분한 영국 의회는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고 매사추세츠 자치권을 박탈하는 강경 정책으로 선회하게 됩니다.
2. 독립전쟁의 발발과 초기 전황
- 렉싱턴·콩코드 전투와 전쟁 발발:
- 1775년 4월, 영국군이 보스턴 인근의 식민지 민병대 무기고를 습격하려 하자 양측 간 무력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벌어진 이 전투로 미국 독립전쟁의 막이 올랐습니다.
- 이후 각지의 민병대가 보스턴 인근에 집결했고, 6월 벙커힐 전투에서는 양측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죠.
- 대륙 의회 소집과 워싱턴의 총사령관 임명:
- 전쟁 발발 직후인 1775년 5월, 필라델피아에서 제2차 대륙의회가 소집되었습니다.
- 대륙의회는 즉각 대륙군을 창설하고 조지 워싱턴을 총사령관에 임명했죠.
- 이어 '독립선언서'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토머스 제퍼슨을 중심으로 한 기초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 초기 전투의 불리함과 밸리포지 작전:
- 초기 전투에서 식민지군은 영국 정규군에 비해 병력과 장비, 훈련 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 1776년 8월 롱아일랜드 전투에서는 대륙군이 큰 타격을 입었고, 뉴욕까지 내주게 되었죠.
- 워싱턴은 전략적 후퇴로 병력을 보존한 뒤, 12월 트렌턴 전투와 프린스턴 전투에서 기습 작전을 펼쳐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3. 새러토가 전투의 승리와 프랑스의 참전
- 영국군의 뉴잉글랜드 포위망 구상:
- 영국군은 뉴잉글랜드 지역의 식민지군 근거지를 고립시키기 위해 북부로부터의 포위망을 구상했습니다.
- 1777년, 버고인 장군은 캐나다에서 출발해 뉴욕주 올버니로 진격했고, 하우 장군은 남쪽에서 북진해 합류하려 했죠.
- 한편 세인트레제 장군이 이끄는 부대는 모호크 계곡을 거쳐 동쪽에서 포위망을 좁혀오기로 했습니다.
- 베네딕트 아널드의 활약과 새러토가 전투:
- 영국군의 포위망 구상을 간파한 워싱턴은 베네딕트 아널드와 호레이쇼 게이츠 장군에게 방어 작전을 지시했습니다.
- 1777년 9월과 10월, 뉴욕주 새러토가 인근에서 양측의 결전이 벌어졌죠.
- 아널드의 활약에 힘입어 대륙군은 격전 끝에 버고인 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고, 영국군 5,700여 명이 항복하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 프랑스의 참전과 국제전 양상으로의 확대:
- 새러토가 전투의 승리는 독립전쟁의 향방을 가른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특히 이 소식은 프랑스를 자극해 참전을 결심하게 했죠.
- 프랑스는 1778년 2월 대륙군과 동맹을 맺고 참전을 선언했습니다. 이에 영국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죠.
- 이로써 독립전쟁은 단순한 식민지 반란의 차원을 넘어, 유럽 열강이 가담한 국제전 양상으로 확대되기에 이릅니다.
4. 요크타운 전투와 파리 조약 체결
- 남부 전선에서의 고전과 그린의 유격전:
- 1780년 이후 전쟁의 무대는 남부 지역으로 옮겨갔습니다. 영국군은 조지아와 사우스캐롤라이나, 노스캐롤라이나를 연이어 점령했죠.
- 그러나 내슈애널 그린 장군이 이끄는 대륙군의 효과적인 유격전에 직면해 남부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 그린의 게릴라전은 영국군을 지치게 했고, 남부민의 민심 이반을 막는 데도 주효했습니다.
- 요크타운 전투와 영국군의 항복:
- 1781년 9월, 워싱턴과 로샹보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은 버지니아의 요크타운으로 진격해 콘월리스가 지휘하는 영국군을 포위했습니다.
- 육상에서 압박하는 한편 프랑스 함대까지 참전하자 콘월리스 군은 사면초가에 놓이고 말았죠.
- 결국 10월 19일, 콘월리스는 항복을 선언했고, 영국군 8천여 명이 무기를 내려놓았습니다.
- 파리 조약 체결과 전쟁의 종결:
- 요크타운 전투의 승리로 독립전쟁의 판도는 결정적으로 기울어졌습니다.
- 영국 본토에서는 왕당파 내각이 물러나고 평화파 내각이 들어섰죠.
- 1782년 11월 파리에서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고, 1783년 9월 파리 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 영국은 미국의 주권과 독립, 영토를 승인했고 미국은 영국인들의 재산권과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5. 신생 공화국의 출범과 연방 헌법 제정
- 독립전쟁의 유산과 공화주의:
- 8년에 걸친 독립전쟁의 승리를 통해 미국은 근대 최초의 공화국으로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 이는 왕정에 맞선 시민의 저항과 자치정신의 승리였죠. 공화주의와 권력 분립, 연방제의 원리가 국가 운영의 근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 아울러 '천부적 자연권', '저항권' 등 혁명사상의 요체가 새 국가의 이념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 1777년 연합규약의 한계:
- 전시였던 1777년에 제정된 연합규약은 국가로서의 통합성과 효율성이 크게 떨어지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 연합규약 체제하에서 중앙정부는 과세권 등 실질적 권한이 없었고, 주 정부 위에 군림할 수 없었죠.
- 이는 국가 통합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했고, 더 강력한 연방제 헌법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 1787년 연방 헌법의 제정:
- 연합규약의 한계를 극복하고 국가의 통합과 번영을 도모하기 위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1787년 5월 필라델피아에서 제헌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 권력 분립과 연방제를 골자로 하는 연방헌법 초안이 기초되었고, 격렬한 토론 끝에 9월 17일 만장일치로 최종안이 승인되었죠.
- 1788년 6월, 9번째 주인 뉴햄프셔의 비준으로 연방헌법은 정식 발효되었습니다. 드디어 미합중국이라는 연방공화국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결론:
미국 독립전쟁은 식민지 주민들의 자치와 독립을 향한 열망이 결실을 맺은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영국의 전제적 식민 통치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저항 운동은 혁명사상에 기반한 무력투쟁으로 발전했고, 마침내 근대 최초의 공화국 탄생으로 귀결되었죠.
물론 영국의 강대한 군사력 앞에서 식민지 민병대의 고난은 컸습니다. 초기 전투에서의 열세, 병력과 물자의 부족 등 전쟁 수행의 애로사항이 적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워싱턴의 리더십과 용맹한 대륙군 병사들의 투혼, 그리고 프랑스의 참전이라는 호재가 맞물리며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습니다.
한편 독립전쟁의 승리로 탄생한 신생 공화국 앞에는 국가 통합과 정체성 확립이라는 숙제가 놓여 있었습니다. 이는 1787년 연방헌법 제정을 통해 일정 부분 해소될 수 있었죠. 연방제와 공화정, 그리고 권력 분립의 원리에 기초한 국가 체제가 마련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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