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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 신유학의 성립과 주자학 (960년 ~ 1279년)

OPYEB 2024.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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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 신유학의 성립과 주자학 (960년 ~ 1279년)


1. 북송 초기 사회상과 사대부의 대두

- 과거제 정비와 사대부 계층의 성장:
    - 송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과거제를 국가 운영의 근간으로 삼았습니다.
    - 절도사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문치주의를 표방한 태조 조광윤은 973년 과거제도를 개혁했죠.
    - 전시(殿試)를 부활시키고 진사과(進士科)를 필수 과목으로 부과했으며, 이를 통해 유교 경전에 정통하고 문장력을 갖춘 사대부 관료를 대거 선발했습니다.
    - 과거제 정비는 사대부 계층의 성장으로 이어졌고, 이들은 송대 사회의 특권적 지위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 사원의 축소와 사대부의 학문적 추구:
    - 송대에는 국자감과 태학이라는 국립 교육기관이 운영되면서 관학 진흥책이 펼쳐졌습니다.
    - 한편 종교계에 대해서는 억압 정책이 시행되어 불교와 도교의 세력이 위축되었죠.
    - 이처럼 송 왕조는 사원 세력을 억제하는 대신 사대부 중심의 유학을 장려했고, 이는 송 문화의 큰 특징이 되었습니다.
    - 사대부들은 학문적 관심을 토대로 다양한 사상적 흐름을 형성해 나갔는데, 이것이 신유학 발달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2. 북송 5자의 등장과 신유학의 형성

- 북송 5자의 사상적 경향:
    - 북송 시대에는 주돈이, 장재, 소옹, 정호, 정이 등 이른바 '북송 5자'라 불리는 대학자들이 등장했습니다.
    - 이들은 한당 시대의 훈고학적 경향에서 벗어나, 유교 경전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시도했죠.
    - 우주의 원리로서의 '태극', 만물을 생성하는 '리'의 개념 등 형이상학적 논의가 심화되었고, 이는 송명이학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 정호, 정이 형제와 도학:
    - 북송 5자 중에서도 특히 정호와 정이 형제의 학설은 남송 시대 주희에 의해 집대성될 신유학의 주요 사상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 호상학(湖上學)으로도 불리는 정씨 형제의 학문은 인간의 본성[性]과 우주의 원리[理]를 일치시키는 '성즉리(性卽理)'를 핵심 명제로 내세웠죠.
    -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등을 강조한 수양론 또한 후대 신유학자들에게 중요하게 계승되었습니다.
- '도학'으로서의 신유학:
    - 북송대 신유학자들은 자신들의 학문 경향을 '도학(道學)'으로 규정했습니다.
    - 단순한 훈고나 주석이 아니라, 우주 원리[道]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 나아가 실천적 수양론으로서의 학문을 의미했죠.
    - 송대 사대부들이 추구한 이 '도학'적 경향은 이후 신유학의 주류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3. 남송의 주희와 신유학의 집대성

- 주희의 생애와 사상적 배경:
    - 남송의 주희(1130~1200)는 정호, 정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신유학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평가받습니다.
    - 그는 소년기 불교도였다가 유학으로 전향했고, 호굉의 제자가 되어 본격적인 학문 활동을 펼쳤죠.
    - 주희는 여러 지역을 유람하며 강학 활동을 벌이는 한편, 여러 차례 관직에 올라 개혁정치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 '사서집주'와 경전 해석학의 완성:
    - 주희가 신유학 집대성자로 평가받는 것은 유교 경전에 대한 그의 해석학적 작업 때문이기도 합니다.
    - 『대학장구』, 『논어집주』, 『맹자집주』, 『중용장구』로 알려진 '사서(四書)집주(集註)'를 통해 경전 해석의 모범을 제시한 것이죠.
    - 『주역본의』, 『시경집전』 등 13경에 대한 주석을 통해서도 규범적 해석을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 리기론과 심성론의 정립:
    - 주희는 우주론적 원리로서의 '태극-리'와 그 현현태로서의 '기'를 구분하는 리기이원론을 정립했습니다.
    - 이는 우주 생성과 변화를 설명하는 형이상학적 토대였죠. 정이의 '성즉리설'을 계승한 그는 본연지성과 기질지성 개념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 이와 함께 인간의 선한 본성[仁]을 확충하는 수양론을 체계화했는데, 이는 후대 성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4. 주자학의 관학화와 영향

- 주자학의 성립과 체계화:
    - 주희의 문인들과 후학들은 주희의 학설을 계승 발전시켜 이른바 '주자학'을 성립시켰습니다.
    - 여기에는 『近思錄』, 『小學』 등과 같은 입문서와 수양서, 주희의 어록과 서신집 등이 종합되어 방대한 주자학 체계를 이루게 되었죠.
    - 주자학은 형이상학, 심성론, 수양론, 경세론 등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학문 체계로서, 송대 사대부들의 사상적 지주 역할을 했습니다.
- 주자학의 관학화와 과거제:
    - 남송 후기에 이르면 주자학은 사실상 국가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 원 간섭기인 1313년, 주자가 편찬한 『사서집주』는 과거 시험의 필수 교재로 지정되었고, 이는 명청대까지 이어졌죠.
    - 이로써 주자학은 사대부 교양의 표준이자 관료 선발의 잣대로 기능하게 되었습니다.
    - 통치 이념으로서의 주자학, 이른바 '주자학적 질서'는 명청 제국을 관통하는 지배 담론으로 작용했습니다.
- 조선에서의 주자학과 성리학:
    - 한반도에서도 고려 말기 신진 사대부들에 의해 신유학이 수용되었습니다.
    - 조선 건국을 주도한 정도전, 권근 등도 성리학자들이었죠. 조선 초기의 사액서원 건립은 성리학 진작책의 일환이었습니다.
    - 16세기 이황, 이이로 대표되는 서인-동인의 학파 논쟁은 주자학을 본격적으로 심화 발전시켰는데, 이는 조선 유학의 독자적 경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결론:

북송에서 남송에 이르는 신유학의 발달 과정은 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적 전환점이었습니다. 주희에 의해 집대성된 신유학, 곧 주자학은 전통 유학에 형이상학과 심성론의 새 경지를 개척했고, 수양론과 경세론의 심화를 가져왔죠. 이는 송대 사대부 계층의 학문적 정체성 형성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제국 통치의 이념적 기반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한편으로 신유학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유교문화권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의를 지닙니다. 정주학을 관학으로 삼은 명청 제국은 물론, 주자학을 숭상하고 성리학을 발전시킨 조선 시대 지성사의 근간 또한 바로 송대 신유학에서 연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관학화된 주자학이 사상의 경직화와 도학주의적 폐단을 낳은 측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자가 제시한 해석을 절대시하는 태도는 때로 사유의 유연성을 저해하기도 했죠. 하지만 형이상학적 사유의 심화와 본체론적 수양론의 강조는 분명 유학 전통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희로 대표되는 송대 신유학의 가르침을 비판적으로 계승할 필요가 있습니다. 경직된 교조주의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도, 만물의 근원을 성찰하고 참된 인간다움을 구현하려 했던 신유학 정신은 되새겨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당면한 현실 속에서 주체적으로 학문하고 실천하는 자세야말로, 우리 시대가 주자학으로부터 배워야 할 덕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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