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메이지 유신과 근대화 과정 (1868년 ~ 1912년)
1. 에도 막부 말기의 위기와 개국
- 쇄국 정책으로 인한 내적 모순 누적:
- 에도 막부는 17세기 이래 '쇄국'이라는 폐쇄적 대외 정책을 고수해 왔습니다.
- 이는 기독교 확산 방지와 무역 통제라는 명분이 있었지만, 점차 경제적 침체와 사회적 모순을 낳는 요인이 되었죠.
- 특히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쌀 생산력 정체,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에 따른 도시 빈민 증가 등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었습니다.
- 미국의 개항 요구와 불평등조약 체결:
-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서양 열강의 접근이 빈번해지자, 쇄국 체제는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 1853년, 미국 해군 제독 페리는 군함을 이끌고 에도만에 내항해 통상을 요구했고, 막부는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죠.
- 이듬해 미일화친조약이 체결되어 시모다, 하코다테 등 항구가 개항되었고,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와도 유사한 조약이 맺어졌습니다.
- 존왕양이 운동과 막부 타도론의 대두:
- 불평등조약 체결로 인한 국권 침탈은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 '천황을 존숭하고 이적을 물리친다'는 구호 아래, 조슈번과 사쓰마번, 토사번 등을 중심으로 막부 타도 기운이 고조된 것이죠.
- 이들 세력은 왕정복고를 내걸고 무력투쟁에 나섰고, 막부의 권위는 급속히 추락해 갔습니다.
2. 메이지 유신과 근대국가 수립
- 메이지 천황의 친정 선포:
- 존왕양이파의 봉기로 권력기반이 흔들리자, 막부는 1867년 11월 권력을 천황에게 반환한다고 선언했습니다.
- 이에 새로 즉위한 메이지 천황은 왕정복고의 대호를 내걸고 친정을 선포했죠.
- 1868년 1월 3일, '王政復古의 대호'를 발표하고 메이지 유신의 기치를 밝힌 것입니다.
- 봉건제 폐지와 중앙집권화:
- 신정부는 우선 막번체제의 해체에 착수했습니다. 1871년에는 폐번치현을 통해 번을 폐지하고 현을 설치했죠.
- 전국을 도쿄 중앙정부 관할 하에 통일함으로써 근대적 중앙집권 체제의 토대를 닦은 것입니다.
- si조카마치 해체, 화족제도 폐지 등 봉건적 신분제도 철폐도 단행되었고, 군사력을 정부가 일원적으로 장악하는 개혁도 추진되었습니다.
- 천황제 절대주의 체제의 수립:
- 신정부는 국가 단결의 상징이자 통치권의 총람자로서 천황의 권위를 절대화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 1889년에는 대일본제국헌법을 제정해 입헌군주제의 틀을 갖추는 한편, 천황 친정에 기반한 절대주의 체제를 공고히 했죠.
- 1890년에는 제국의회를 개설했지만, 천황의 권한은 의회에 우선하는 것으로 규정되었습니다.
3. 산업 근대화와 자본주의 발달
- 전제 산업 정책과 수출 주도 경제:
- 메이지 정부는 전례 없는 산업 육성책을 펼쳤습니다. 초기에는 관영 모델 공장을 세워 기술을 습득하는 데 주력했죠.
- 이어 민간 자본에 이를 불하하고 수출 산업을 지원하는 정책으로 전환했습니다. 면화, 견직물, 차 등이 수출 주력 상품이었어요.
- 정부 주도형 자본주의 발전 전략은 재벌 기업의 성장으로 이어졌고, 이는 전시 통제경제의 기반이 되기도 했습니다.
- 산업 기반 시설의 확충:
- 산업 근대화에는 사회간접자본 확충도 뒷받침되어야 했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철도, 도로, 항만, 통신 등 인프라 건설에 국가 예산을 집중 투입했죠.
- 도쿄와 요코하마를 잇는 일본 최초의 철도가 개통된 것이 1872년의 일이고, 이후 철도망은 급속도로 확장되어 갔습니다.
- 강점기 한반도에서 추진된 철도 건설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진행된 것이기도 합니다.
- 근대 교육제도의 정비:
- 메이지 정부는 부국강병의 인적 토대를 마련한다는 취지로 교육제도 정비에도 힘썼습니다.
- 1872년 학제를 반포해 초등교육을 의무화했고, 중등학교와 사범학교, 대학 등을 잇따라 설립했죠.
- 문부성 발족, 사범학교령과 교육령 제정 등을 통해 교육의 질적 수준을 제고하는 정책도 병행되었습니다.
4. 자유민권운동과 정치 근대화
- 민선의원설립 개진서와 자유민권파의 대두:
- 메이지 초기 개명 관료 출신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민주적 의회 설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제기되었습니다.
- 이타가키 타이스케는 1874년 민선의원 설립 건백서를 제출했고, 이를 계기로 자유민권운동이 시작되었죠.
- 이어 각지에서 토지세 폐지와 민권 신장, 헌법 제정을 요구하는 세력이 결집하기 시작했습니다.
- 국회개설 청원운동과 정부의 탄압:
- 1880년 국회개설기성동맹회가 결성되어 국회 개설 청원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 그러나 정부는 집회조례와 출판조례를 강화하고 자유민권 세력을 강경 탄압하는 방침을 폈죠.
-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을 제정해 형식적 입헌주의는 수용했지만, 천황 주권의 절대성은 견지했습니다.
- 입헌정친회와 초기 정당 정치:
- 1890년 제1회 중의원 선거가 실시되면서 일본은 제한적이나마 근대 정당 정치의 토대를 마련하게 됩니다.
- 초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한 이토 히로부미는 입헌정친회를 조직해 정권을 장악했고, 본격적인 의회 정치가 시작되었죠.
- 그러나 천황 및 원로 세력의 초헌법적 권력인 '초근대'와 의회의 '근대'가 공존하는 이중 구조가 일본 정치의 특징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5. 제국주의로의 전환과 韓日/日露 전쟁
- 불평등조약 개정과 아시아 팽창주의:
- 메이지 정부는 서구와 맺은 불평등조약 개정을 통해 일본의 국제적 위상을 제고하려 했습니다.
-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타이완을 할양받는 등 제국주의 열강의 仲間入り를 과시했죠.
- 이는 곧 한반도와 만주로의 세력 확장, 즉 대륙 병탄주의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 한일전쟁과 을사늑약:
- 청일전쟁 승리 이후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 갔습니다.
- 1904년에는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하면서 사실상 보호국으로 삼았죠.
- 이듬해에는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통감부를 설치해 내정간섭을 노골화했습니다.
- 러일전쟁과 한국 강제병합:
- 일본은 만주와 한반도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고, 미국과 영국의 지원 속에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 포츠머스 강화조약에 따라 러시아로부터 남만주 철도권과 관동주 조차권을 양도받았죠.
- 이어 1910년에는 한국을 무력으로 강제병합하고, 본격적인 식민지배에 착수했습니다. 제국주의 일본의 출발이었습니다.
메이지 유신과 근대화 과정은 후발 자본주의 국가의 압축 성장을 보여주는 대표적 역사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메이지 초기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일본은 불과 반세기 만에 봉건체제를 극복하고 근대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특히 관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 확립, 전제적 산업정책 추진, 국민 교육 강화 등은 국가 주도 근대화의 성공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근대화 과정에서 노정된 한계와 문제점도 적지 않았습니다. 노동과 생활 기반을 상실한 전 사무라이 계급의 대규모 몰락은 사회 혼란의 한 요인이 되었고, 자유민권 열망을 억누른 채 추진된 절대주의 체제는 민주주의 발전에 장애가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팽창주의와 군국주의로의 선회는 주변국 침략의 불씨를 남겼죠.
메이지 일본의 근대화 여정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남깁니다. 무엇보다 서구의 충격에 직면해 자주적 근대화를 이룩한 저력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민족 의식 고양과 사회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은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도 수용·발전되었던 모델이 되었습니다.
물론 국가주의의 폐단과 군국주의의 위험성 또한 반면교사가 될 만한 대목입니다. 국가가 모든 것을 행하고 개인은 국가에 봉사해야 한다는 전체주의적 관념, 부국강병에 경도되어 팽창을 정당화하는 제국주의 논리는 오늘날 우리가 경계해야 할 요소입니다.
근대화라는 역사적 과제에 직면해 동아시아 국가들이 걸어온 상이한 궤적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중국의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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