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

김영삼 정부의 개혁정책과 시련

OPYEB 2024. 9. 13.
반응형

김영삼 정부의 개혁정책과 시련


1. 문민정부의 출범과 개혁 드라이브

- 제14대 대선과 김영삼의 당선:
  -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 민주자유당 후보 김영삼이 42%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습니다.
  - 김영삼은 '변화'와 '개혁'을 내세우며 군부 정치 청산과 부패 척결을 약속했습니다.
- 공직자 재산 공개와 금융실명제 실시:
  - 김영삼 정부는 출범과 함께 고위공직자 재산등록과 공개를 의무화했습니다.
  - 또한 금융거래 실명제를 전면 실시하여 지하경제 양성화와 부정부패 척결을 도모했습니다.
- 5·18 관련자 처벌과 군의 문민화:
  - 김영삼 정부는 12·12와 5·18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에 착수했습니다.
  -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구속하고, 군 내부의 군부 세력을 숙청하는 등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 지방자치제의 전면 실시:
  - 1995년 전국 동시 지방선거가 실시되어 기초의회의원과 광역·기초단체장을 선출했습니다.
  - 30여 년 만에 부활한 지방자치제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2. 경제 위기와 IMF 구제금융

- 1997년 외환위기 발생:
  - 1990년대 후반 기업의 무분별한 차입경영, 금융기관의 부실 등으로 경제 불안이 가중되었습니다.
  - 1997년 하반기 태국발 동남아 외환위기가 한국으로 전이되면서 외환보유고가 바닥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 IMF 구제금융 요청:
  - 정부는 1997년 12월 3일 IMF에 긴급구제금융을 요청했습니다.
  - 이는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경제적 위기로, 한국경제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기업과 금융 부문 구조조정:
  - IMF 요구에 따라 기업과 금융 부문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착수했습니다.
  - 부실기업의 퇴출, 은행 감자와 합병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이뤄졌습니다.
  - 기업의 부채비율 축소, 경영투명성 강화 등 '4대 부문 개혁'이 추진되었습니다.


  

3. 노사관계 악화와 노동운동

- 노동법 개정을 둘러싼 갈등:
  - 김영삼 정부는 1996년 12월 국회에서 여당 단독으로 노동법을 개정했습니다.
  - 정리해고제 도입, 변형근로시간제 확대 등을 골자로 한 개정안은 노동계의 강한 반발을 샀습니다.
- 한국노총의 총파업과 노사정위원회 구성:
  - 1997년 1월 한국노총은 노동법 개정을 저지하기 위해 총파업에 돌입했습니다.  
  - 정부는 파업에 강경 대응하는 한편, 노사정위원회 구성에 합의했습니다.
  - 노사정위는 노동법 재개정 협상을 타결 짓고 사회적 합의를 모색했습니다.
- 정리해고제 시행과 실업대란:
  - 1998년 경제위기 속에서 정리해고제가 본격 시행되었습니다.  
  - 기업 구조조정과 맞물려 대규모 해고사태가 벌어지며 '실업대란' 양상을 빚었습니다.
  - 실업자 수는 1998년 150만 명에 육박했고 노사갈등이 격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4. 정책 실패와 정경유착 논란

- 전직 대통령 사면과 정치적 타협:
  - 김영삼 대통령은 재임 말기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사면했습니다.
  - 군부 세력과의 정치적 타협, 정경유착의 온상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 아들 비리 의혹과 정치적 타격:
  - 1996년 대통령 아들 김현철의 비리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 김현철 구속으로 김영삼 정부는 정치적 타격을 입었고 개혁 동력을 상실했습니다.
- 성수대교 붕괴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 19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로 30여 명이 사망하는 인재가 발생했습니다.
  - 1995년 6월 삼풍백화점 붕괴로 500여 명의 사상자가 나는 대형 참사로 이어졌습니다.
  - 이는 성장 위주 정책에 따른 안전 불감증을 드러낸 사례였습니다.



5. 대통령 선거와 정권 교체

- 대선 후보 단일화 노력의 좌절:
  -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야권에서는 단일후보 추대를 시도했습니다.
  - 하지만 김대중과 김종필 간 합의가 결렬되면서 야권 단일화가 무산되었습니다.
- 김대중의 대선 승리와 수평적 정권교체:
  - 1997년 12월 치러진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40.3%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습니다.
  -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 최초로 여야 간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뤄냈고, 민주화 이후 최초의 진보 정권을 수립했습니다.



김영삼 정부는 '문민정부'를 표방하며 본격적인 민주화와 개혁정치를 추진했습니다. 금융실명제, 지방자치제, 5공 청산 등은 한국 정치사회의 민주화를 진전시킨 성과로 평가받습니다. 하지만 개혁 과정에서 드러난 정경유착, 정책 혼선과 실패는 한계로 지적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1997년 IMF 외환위기는 고속성장의 이면에 자리한 한국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이후 한국 사회가 감내해야 할 고통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문민정부 시대의 성과와 한계는 새로운 정부에게 극복의 과제로 남겨지게 됩니다.​​​​​​​​​​​​​​​​

반응형

댓글

💲 추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