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F. 케네디 (John Fitzgerald Kennedy, 1917-1963) -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신 프론티어'라는 구호 아래 진보적 정책을 추진했으며, 냉전 시대 미소 간 핵전쟁 위기를 평화적으로 돌파한 것으로 유명하다. 임기 도중 암살되어 짧은 재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꼽힌다.
1. 탄탄한 집안 배경과 화려한 이력
- 정치인 집안에서 태어나다:
- 1917년 5월 29일, 존 F. 케네디는 매사추세츠주 부유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 아버지 조지프 P. 케네디 Sr.는 정계와 경제계에서 활약한 거물로, 대통령을 배출한 명문 켄디가의 가훈을 세웠다.
- 어머니 로즈 케네디 역시 정치인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존에게 정치가의 꿈을 심어주었다.
- 英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에게 사사받다:
- 1935년 케네디는 런던 정치경제대학(LSE)에서 해롤드 라스키 교수에게 사사받았다.
- 당시 라스키 교수는 노동당 이론가로서 사회주의 경제학을 강의했는데, 이는 케네디의 정치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8세에 하버드에 입학한 케네디는 우수한 성적으로 정치학을 전공하고 졸업했다.
- 참전 영웅에서 정계로 진출하다:
- 2차 세계대전 당시 케네디는 태평양 전선에서 미 해군 장교로 활약했다.
- 특히 그가 지휘하던 어뢰정이 일본군에 의해 격침되었을 때, 부상 장병들을 구조하며 영웅으로 부상했다.
- 전역 후 케네디는 정계에 진출해 1947년 매사추세츠 제11선거구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1952년에는 상원의원에 당선되며 정치적 입지를 다져갔다.
2. 뉴 프론티어 정책과 냉전 시대 위기 대응
- 1960년 대선과 뉴 프론티어 구상:
- 1960년 민주당 대선 후보로 지명된 케네디는 '뉴 프론티어'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 이는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계승한 것으로, 경제 성장과 사회 개혁을 동시에 추구하는 정책이었다.
- 선거 운동 기간 케네디는 TV 토론에서 압도적인 재치와 카리스마를 발휘해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 닉슨과의 초접전 끝에 당선되다:
- 케네디의 상대 후보는 당시 부통령이던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이었다.
- 득표율 49.7% 대 49.6%라는 초접전 끝에 케네디는 신승을 거두며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에 올랐다.
- 그의 취임사에서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를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으라"는 유명한 문구가 나왔다.
- 쿠바 미사일 위기 돌파:
- 1962년,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면서 미국과 소련은 핵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다.
- 이때 케네디는 소련에 단호한 입장을 취하는 한편, 소련 지도자 흐루쇼프와의 비밀 협상을 통해 전쟁을 막았다.
- 결국 소련이 쿠바에서 핵미사일을 철수시키면서 위기는 평화롭게 해결되었고, 이는 케네디 외교의 최대 성과로 꼽힌다.
- 베트남전 개입 확대:
- 반면 케네디 시기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 1961년 남베트남 지원을 위해 미군 고문단을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케네디 행정부는 남베트남에 대한 군사 지원을 계속 확대해 갔다.
- 이는 이후 베트남 전쟁으로 비화되어 미국에 대참사를 안기게 된다.
3. 국내 개혁 정책과 암살
- 경기 부양과 우주개발 추진:
- 취임 직후 케네디는 경기 침체 타개를 위해 감세와 재정지출 확대 등 경기부양책을 폈다.
- 특히 그는 소련과의 우주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NASA 예산을 대폭 증액하고 유인 달 탐사 계획을 발표했다.
- 그 결과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이라는 쾌거를 이룰 수 있었다.
- 흑인 차별 철폐와 공민권법 추진:
- 케네디는 집권 초기부터 인종차별 철폐를 위해 노력했다.
- 1963년 6월에는 연방정부 시설의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 또한 그해 6월 공민권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는데, 이는 흑백분리를 철폐하는 법안이었다. 그러나 케네디가 암살된 뒤에야 의회를 통과하게 된다.
- 달라스에서의 암살:
-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주 달라스를 방문 중이던 케네디는 암살당했다.
- 퍼레이드 도중 케네디가 탄 리무진에 총격이 가해졌고,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숨졌다.
- 범인으로 지목된 리 하비 오스왈드는 경찰에 체포된 지 이틀 만에 잭 루비에 의해 살해당했고, 이로 인해 케네디 암살에는 음모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상과 같이 존 F. 케네디는 활력 넘치는 카리스마로 시대정신을 대변한 지도자였다. 그가 주창한 '新 프론티어 정신'은 1960년대 초 변화를 갈망하던 미국인들의 열망을 집약한 것이었다. 또한 냉전의 최전선에서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했던 정치인이기도 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보여준 케네디의 리더십은 핵전쟁의 벼랑 끝에서 인류를 구원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반면 베트남 개입 확대나 흑인 민권운동 초기 대응 등에서는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너무 짧았던 임기로 인해 케네디가 남긴 과제는 후임자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졌다. 그럼에도 케네디가 보여준 희망과 개혁의 메시지는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마치 그의 살해가 희망의 좌절을 상징하듯, 존 F. 케네디의 죽음은 미국인들의 가슴에 큰 상실감을 남겼다. 요절한 지도자에 대한 애도는 종종 그를 신화화하기도 한다. 역사 속의 존 F. 케네디. 그가 남긴 정치적 유산과 함께, 자유와 정의를 향한 그의 도전정신 또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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