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다 메이어 (Golda Meir, 1898-1978) - 이스라엘의 제4대 총리. '철의 여인'이라 불리며 이스라엘 건국 초기 국가 체제를 공고히 다진 정치가이자, 중동 분쟁 속에서 강경노선을 견지한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1. 우크라이나에서 미국으로, 시온주의자로 성장하다
-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다:
- 골다 메이어는 1898년 5월 3일, 당시 러시아 제국 영토였던 우크라이나 키엡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 아버지 모셰와 어머니 블루마 네이도치의 딸로, 여덟 형제자매 중 막내였다.
- 당시 우크라이나의 유대인들은 차별과 박해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고, 메이어 가족 역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 미국 이민 후 교사로 일하다:
- 1906년, 골다의 가족은 우크라이나를 떠나 미국 위스콘신 주 밀워키로 이민을 간다.
- 14세의 골다는 밀워키의 공립학교에 다니며 공부에 매진한다.
- 17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골다는 교사 자격증을 딴 후 밀워키의 한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기 시작한다.
- 시온주의 운동에 투신하다:
- 골다는 어려서부터 유대인의 민족적 정체성에 각별한 애착을 느껴왔다.
- 미국에서 그녀는 시온주의 운동에 적극 가담하며 이스라엘 건국의 꿈을 키워나갔다.
- 1915년, 골다는 시온주의 단체 '포알레 치온'의 지부를 조직하고 의장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2.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와 이스라엘 건국
-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가다:
- 1921년, 골다는 남편 모리스 메이어슨과 함께 당시 영국 위임통치령이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다.
- 팔레스타인에서 그들은 키부츠 '메르하비아'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척박한 땅을 개간해 나갔다.
- 이 시기 골다는 유대인 여성단체 활동에도 적극 가담하는 등 현지에서의 활동 반경을 넓혀갔다.
- 히스타드루트와 여성 지위 향상에 힘쓰다:
- 1928년, 골다는 유대 노동자 총연맹 '히스타드루트'의 여성부 대표로 선출된다.
- 여성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과 정치적 지위 향상을 위해 골다는 여성 할당제 등 각종 제도를 도입해 나갔다.
- 이후에도 히스타드루트의 정치부장, 예루살렘 지부장 등을 역임하며 파워 엘리트로 성장해갔다.
- 이스라엘 건국과 초대 대사로:
-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언되자 골다는 초대 주소련 대사에 임명된다.
- 소련은 이스라엘을 가장 먼저 승인한 국가였기에, 골다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 이후 골다는 노동당 의원으로 당선되어 의회 활동을 시작했고, 1949년에는 초대 노동부 장관을 맡게 된다.
3.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 골다 메이어 내각의 출범:
- 1969년, 레비 에시콜 총리의 사망으로 골다 메이어는 이스라엘의 제4대 총리에 올랐다.
- 이집트와 시리아의 위협이 고조되는 가운데, 철의 여인 골다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 골다 메이어 내각은 안보를 최우선시하면서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이주를 독려하는 정책을 폈다.
- 욤 키푸르 전쟁과 전화위복:
- 1973년 10월, 이집트와 시리아가 갑자기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면서 욤 키푸르 전쟁이 일어났다.
- 초반 이스라엘군은 악전고투하며 골다 정부에 대한 비난여론이 들끓었다.
- 그러나 미국의 군사 지원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군은 역전에 성공했고, 오히려 상대국 영토를 더 많이 확보하게 되었다.
- 퇴임 후 그녀가 남긴 것들:
- 욤 키푸르 전쟁 이후 골다 메이어는 총리직에서 물러났지만, 이스라엘 현대사에서 그녀가 남긴 흔적은 지울 수 없다.
- 강인한 리더십과 확고한 신념으로 이스라엘의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 1978년 12월 8일 골다 메이어는 예루살렘의 하다사 병원에서 림프종으로 사망했다. 그녀의 국장에는 수많은 추모 인파가 모였다.
이상과 같이 골다 메이어는 이스라엘 건국 초기, 척박한 현실 속에서 국가를 이끌었던 강인한 지도자였다. 특유의 결단력과 추진력으로 이스라엘의 입지를 다져나간 그녀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팔레스타인 문제와 중동 분쟁에 있어서의 강경책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유대인의 안전과 번영을 최우선시하는 그녀의 입장이 역으로 평화로운 해법을 모색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골다 메이어가 이스라엘 건국의 어머니로서 존경받는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디아스포라의 설움을 간직한 채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그녀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국민들의 가슴속에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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