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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볼리바르 (Simón José Antonio de la Santísima Trinidad Bolívar y Palacios Ponte-Andrade y Blanco, 1783-1830) - 남아메리카의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정치가. '엘 리베르타도르'(해방자)로 불리며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등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독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OPYEB 2024.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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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볼리바르 (Simón José Antonio de la Santísima Trinidad Bolívar y Palacios Ponte-Andrade y Blanco, 1783-1830) - 남아메리카의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정치가. '엘 리베르타도르'(해방자)로 불리며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등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독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 귀족 가문 출신의 청년 혁명가

- 카라카스의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다:
    - 1783년 7월 24일, 시먼 볼리바르는 지금의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태어났다.
    - 아버지 후안 비센테 볼리바르는 바스크 출신의 부유한 지주였고, 어머니 마리아 데 라 콘셉시온 팔라시오스 이 블랑코 또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 볼리바르는 어려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고 삼촌 카를로스 팔라시오스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
- 유럽 유학과 계몽사상의 영향:
    - 16세에 스페인 마드리드로 건너간 볼리바르는 이곳에서 계몽사상을 접했다.
    - 특히 장 자크 루소와 볼테르의 저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프랑스 revolution 정신에 깊이 공감했다.
    - 21세에는 파리에서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직접 목격하면서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상을 꿈꾸기 시작했다.
- 아내의 죽음과 결단:
    - 19세의 나이에 볼리바르는 마드리드 태생의 귀족 마리아 테레사 로드리게스 델 토로와 결혼했지만, 결혼 후 8개월 만에 그녀는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 아내의 죽음은 볼리바르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는 고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다지게 된다.
    - 이때 로마에서 자신의 스승 시몬 로드리게스와 함께 몬테 사크로 언덕에서 조국 해방을 맹세했다고 전해진다.

2. 라틴아메리카 독립운동의 영웅

- 베네수엘라 독립운동에 가담하다:
    - 1808년,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을 계기로 라틴아메리카 식민지들의 독립운동이 시작되자 볼리바르 역시 독립을 위해 투쟁하기로 결심한다.
    - 1810년 카라카스에서 일어난 독립 시위에 동참한 그는 곧이어 런던으로 가 영국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한 사절단에 가담한다.
    - 1813년 8월 카라카스로 돌아온 볼리바르는 '해방자'라는 칭호를 얻으며 베네수엘라 독립군의 사령관이 된다.
- 콜롬비아와 에콰도르 독립에 앞장서다:
    - 1819년 여름, 볼리바르는 안데스 산맥을 넘어 뉴그라나다(현재의 콜롬비아) 지역으로 원정을 떠난다.
    - 험준한 안데스 산맥을 넘는 이 대장정은 남미 독립 전쟁사에 전설로 남게 된다.
    - 8월 볼리바르는 보야카 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며 보고타를 해방시키고, 이듬해 6월에는 베네수엘라와 뉴그라나다를 아우르는 콜롬비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 페루와 볼리비아 독립의 완성:
    - 1821년 볼리바르는 콜롬비아군을 이끌고 페루로 진격해 1824년 12월 아야쿠초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격파한다.
    - 그 결과 페루와 볼리비아(당시 명칭 '토막')가 잇따라 독립을 쟁취하게 되고, 볼리바르는 해방자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한다.
    - 특히 후일 '볼리비아'로 국명이 바뀐 토막 지역은 시몬 볼리바르를 가장 숭앙하는 곳이 되었다.

3. 대콜롬비아 연방의 좌절과 만년

- 대콜롬비아 연방의 건국과 분열:
    - 1821년 볼리바르는 오늘날의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파나마를 아우르는 거대 연방국가인 '대콜롬비아'를 출범시켰다.
    - 그러나 광활한 영토에 걸쳐 있는 해방 지역들을 하나로 묶어내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 각 지역의 이해관계 상충, 볼리바르 독재에 대한 반발 등으로 연방은 점차 분열되어 갔다.
- 암살 미수와 정계 은퇴:
    - 1828년 9월, 권력 장악에 불만을 품은 반대파들은 볼리바르를 암살하려 시도했으나 그는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 이 사건 이후에도 대콜롬비아 연방의 결속은 점점 와해되어 갔고, 1830년 1월 볼리바르는 결국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 같은 해 12월 17일, 산타 마르타에서 결핵과 간경화로 고통받던 볼리바르는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혁명가이자 해방자, 통합의 정치가로서 시몬 볼리바르의 삶은 라틴아메리카 근대사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식민 지배로부터 대륙을 해방시키려 한 그의 투쟁은, 비록 완전한 성공을 거두진 못했으나 라틴아메리카 국민국가 형성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역사적 의미가 있다. 특히 민족 자결과 대륙 연대를 강조한 그의 이상은 오늘날 라틴아메리카 통합 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남아있다. 다만 그의 독재적 성향과 연방 와해에 대한 무력함 또한 한계로 지적되곤 한다.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시몬 볼리바르만큼 중남미인들의 기억과 정서에 깊이 각인된 인물도 드물 것이다. 해방자이자 영웅, 애국자로서 라틴아메리카 곳곳에 존경과 추앙의 대상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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