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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발발과 전개 과정

OPYEB 2024.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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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발발과 전개 과정

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야욕

- 일본의 전국시대와 히데요시의 등장:
  - 16세기 일본은 전국시대라 불리는 군웅할거의 혼란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 이 시기 오다 노부나가에 이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등장하여 전국 통일 사업을 완수했습니다.
  - 히데요시는 오랜 내전을 마감하고 막부 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해외 원정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 조선 침략의 명분과 야욕:
  - 히데요시는 명나라 정벌을 구실로 조선 침략을 결심했습니다.
  - 조선을 병참기지로 삼아 명을 공격한다는 것이 표면적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영토 확장과 약탈이 주된 동기였습니다.
  - 또한 해외 원정을 통해 국내 무장들을 누르고 막부의 권위를 과시하려는 속셈도 있었습니다.
- 사전 교섭 과정에서의 갈등:  
  - 히데요시는 1587년부터 對馬島主 소 요시토시를 통해 조선에 국서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 국서에는 일본의 조선 침략 의지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는데, 조선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들이었습니다.
  - 선조는 불가함을 거듭 밝혔고, 이는 히데요시의 반발을 샀습니다.
  - 교섭 과정에서의 불신과 대립이 전쟁 발발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부산포 전투와 초기 전황

- 1592년 4월 부산포 상륙과 왜군의 진격:
  - 1592년 4월 13일 왜군 선봉대 1만 8700명이 부산포에 상륙했습니다.
  - 부산진성을 지키던 조선군은 화약이 떨어져 하루 만에 성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 이후 속속 상륙한 왜군 대군은 김해, 양산, 밀양 등지로 빠르게 북상했습니다.
- 경상도 함락과 영남 지역 장악:
  - 합포, 웅천, 금산, 진주, 김해 등 경상도 주요 지역이 차례로 함락되었습니다.
  - 창원, 현풍 등에서 격전이 벌어졌으나 조선군은 열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 궁예 이래 최대 규모인 10만여 명에 이르는 왜군이 영남 지역을 석권했습니다.
- 충청도 진출과 조정의 위기감:
  - 5월 들어 왜군은 낙동강을 건너 대구, 상주 등을 거쳐 충청도로 진출했습니다.
  - 충주성이 함락되고 청주마저 위협받자 조정에 위기감이 고조되었습니다.
  - 급기야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길에 오르게 됩니다.



3. 행주대첩과 진주대첩

- 권율의 행주산성 방어전:
  - 1592년 5월 행주산성에서는 권율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과 3만여 왜군이 맞붙었습니다.
  - 권율은 불과 2,300명으로 적과 맞섰으나 행주산성의 지형을 이용한 방어전으로 왜군을 물리쳤습니다.
  - 행주대첩으로 한강 도하가 저지되어 왜군의 진격에 제동이 걸렸습니다.
  - 권율의 승전으로 위축되었던 조선군의 사기가 크게 진작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김시민의 진주성 사수:
  -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김시민은 거의 함락 직전이던 진주성을 3,800여 명으로 사수했습니다.
  - 성 밖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성을 지키는 한편, 북을 울려 왜적을 위협하고 민심을 결집했습니다.
  - 진주성 승전으로 경상도 서부 지역이 왜군에 대한 저항 거점이 될 수 있었습니다.
- 초기 전투의 의미와 영향:
  - 행주대첩과 진주대첩은 절대적 열세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 뛰어난 지휘관의 능력과 지형 이용, 민·관·군의 협력이 승패를 좌우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 또한 곽재우, 조헌 등 의병 활동이 본격화되어 왜군에 타격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4. 이순신의 해전과 명군의 참전

- 옥포해전과 한산도대첩:
  - 3도 수군통제사 이순신은 1592년 5월 옥포해전에서 첫 승리를 거뒀습니다.
  - 이어진 사천포해전, 당포해전, 당항포해전, 율포해전에서도 연전연승을 기록했습니다.
  - 8월에는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군 대선단 133척을 무찔러 제해권을 장악했습니다.
- 명나라 원군의 참전: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神宗은 조선을 구원하기로 결정하고 원군을 파견했습니다.
  - 1592년 8월 명군 3만여 명이 참전했고, 평양성 탈환전에서 승리를 거뒀습니다.
  - 명군과 연합한 조선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개경 등지에서도 왜군을 몰아내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 강화교섭과 명군의 철수:
  - 전세가 기울자 히데요시는 강화교섭을 제안했습니다.
  - 1593년 강화교섭이 타결되어 명군이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 그러나 강화는 히데요시의 꼼수에 불과했고, 재침을 위한 시간벌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5. 정유재란과 전쟁의 종결

- 1597년 정유재란의 발발:
  - 히데요시는 명의 칭제건원 요구를 거부하고 1597년 재침을 감행했습니다.
  - 정유재란은 임진왜란에 비해 격전지가 경상도 남부에 국한되는 등 전선이 좁아졌지만 더욱 치열했습니다.
- 칠천량해전과 명량해전:  
  - 1597년 7월 칠천량해전에서 아군의 패배로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었습니다.
  - 후임 원균이 이끈 수군은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여 전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 이순신이 재기용되어 이룬 명량해전 승리는 해전사에 남을 대승이었습니다.
  -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을 물리친 이순신의 승전은 전쟁의 흐름을 되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노량해전과 전쟁의 종결:
  -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은 노량해전을 끝으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 그러나 노량해전에서의 승리로 남해안 일대에서 왜군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 연이은 военaire의 사망으로 일본군의 전의가 상실되었고, 회군이 시작되었습니다.
  - 1598년 일본군의 철수로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이 마침내 막을 내렸습니다.



임진왜란은 근대 이전 한일관계사에서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모한 침략 야욕이 빚어낸 인류사의 대참극이기도 했지요. 조선은 개전 초기 급습을 당해 한양까지 함락되는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그러나 행주대첩, 진주대첩을 통해 왜군의 북진을 저지했고, 이순신 장군의 해군이 제해권을 장악하며 전세를 역전시켰습니다. 곽재우, 조헌으로 대표되는 의병 활동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7년 전쟁 끝에 조선은 한반도에서 왜군을 몰아냈고, 민족의 자주성을 지켜냈습니다. 하지만 그 댓가는 너무나 컸습니다. 수많은 조선인들이 희생되었고, 국토는 초토화되다시피 했습니다.
임진왜란이 남긴 상처는 오래도록 아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른 날의 폭풍우처럼 덮쳐온 국난을 극복해낸 저력 또한 우리 민족사의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순신, 권율, 곽재우로 대표되는 민족 영웅들의 활약상은 길이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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