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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민주정의 성립과 발전 (기원전 6세기~기원전 4세기)

OPYEB 2024.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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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테네 민주정의 성립 배경

- 솔론의 개혁과 평민권 신장:
    - 기원전 6세기 초, 아테네는 심각한 정치·사회적 혼란에 빠져있었습니다. 농지 겸병으로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평민의 불만이 고조되던 상황이었죠.
    - 이런 위기 속에서 등장한 솔론은 세이삭테이아(부담 면제) 정책을 통해 평민의 처지를 개선하고자 했습니다.
    - 과도한 채무를 탕감하고 신체를 담보로 한 채무 노예 제도를 폐지했으며, 4등급 재산 등급제인 티모크라티아를 도입해 평민의 정치 참여를 확대했습니다.
-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과 민주정의 토대 확립:
    - 솔론의 개혁에도 귀족과 평민 간 갈등이 지속되던 가운데,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집권하기도 했습니다.
    - 그러던 중 기원전 508년, 클레이스테네스가 등장해 민주정의 토대를 마련하는 개혁을 단행했죠.
    - 그는 혈연에 기반한 부족제를 혁파하고 거주지에 따른 10부족 50구제를 도입해 지역 단위의 평등을 구현했습니다. 500인 평의회, 10명의 장군직을 신설하고 도편 추방제를 마련해 참주의 출현을 막고자 했습니다.
-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과 해군 강화:
    - 아테네가 민주정으로 발전해가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0년~기원전 479년)이었습니다.
    -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로 그리스의 자유를 수호한 아테네는 막대한 자긍심을 얻었죠.
    - 전쟁 과정에서 노 젓는 군사로 활약한 하층 평민(테테스)의 정치적 발언권이 강화되었고, 해군력 증강을 위한 투자가 이어지면서 민중의 지위가 높아졌습니다.



2. 페리클레스 시대 민주정의 전성기

- 페리클레스의 개혁과 민주정 강화:
    - 기원전 5세기 중엽, 정치가이자 장군인 페리클레스가 아테네 정치를 주도하면서 민주정은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 그는 국고에서 공직자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정책을 도입해 빈민층의 정치 참여를 독려했죠.
    - 또한 연합금을 아테네로 옮기고 해군력을 증강함으로써 아테네 제국의 패권을 공고히 했습니다.
- 민주정의 제도적 완성:
    - 페리클레스 시대 민주정의 제도적 장치들이 확립, 정비되었습니다.
    - 민회는 정책 결정의 최고 기구로서 비중이 커졌고, 평의회는 민회에 안건을 상정하고 의결을 집행하는 역할을 담당했죠.
    - 법정에서는 6000명의 배심원단이 추첨을 통해 구성되어 사법권을 행사했고, 도편추방제도 민주정 수호 장치로 자리 잡았습니다.
- '페리클레스의 장례 연설'과 민주정신:
    - 페리클레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 전사자들을 기리는 장례식 추모사를 통해 아테네 민주정의 이상을 집약적으로 표현했습니다.
    - "우리의 국가는 주변의 모범이 되고 있다. ... 우리는 모든 시민이 평등한 정의를 누리지만, 공적에 있어서는 특출한 자가 선발된다."
    - 개인의 자유, 관용의 정신, 능력에 따른 정치 참여 등 폴리스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를 제시함으로써, 아테네 민주정신의 정수를 보여주었습니다.



3. 아테네 민주정의 한계와 쇠퇴

- 제국주의적 팽창과 폴리스 자치의 훼손:
    - 델로스 동맹 결성 이후 아테네는 강압적인 제국주의 정책을 펼치며 동맹국들의 자치권을 침해해갔습니다.
    - 연합금을 임의로 인상하고 속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등 패권적 행태를 보였죠.
    - 이는 자유와 평등의 이상에 입각한 폴리스 민주주의 정신과 모순되는 것이었고, 스파르타 등 타 폴리스들의 반발을 초래했습니다.
-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패배와 민주정의 위기:
    -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패권 경쟁이 격화되면서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년~기원전 404년)이 발발했습니다.
    - 전쟁 초기 아테네를 강타한 역병으로 페리클레스가 사망하자, 민중의 지지에 기댄 급진 민주파가 득세하게 됐죠.
    - 결국 기원전 404년 아테네가 패배하면서, 민주정은 과두정으로 대체되는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 민주정의 한계와 폴리스 체제의 동요:
    - 아테네 민주정은 폴리스 내 성인 남성 시민에 한정된 정치 체제였습니다. 여성, 외국인, 노예 등 다수의 구성원은 참정권에서 배제되었죠.
    - 직접민주주의 방식은 정책 결정의 전문성과 신중함이 부족하고, 선동적 수사에 취약하다는 한계도 노정되었습니다.  
    - 이는 폴리스 체제 자체의 구조적 취약성과 맞물려 고전기 그리스 문명을 동요시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결론

아테네 민주정은 폴리스라는 도시국가 공동체에서 시민의 직접 참여에 의한 정치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인류 정치사의 한 획을 그은 실험이었습니다. 솔론과 클레이스테네스, 페리클레스로 이어지는 개혁을 통해 평민의 권리를 신장시키고, 민회와 평의회, 배심원제, 도편추방제 등 민주정의 제도적 틀을 마련한 것은 큰 성과였죠.
특히 페리클레스 시대는 민주정의 이상이 구현된 전성기로서, '폴리스적 자유'의 고전적 범례로 남아있습니다.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의 포용, 공동선을 위한 정치 참여 등 폴리스 민주주의의 가치는 근대 이후 민주주의 발전사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아테네 민주정은 분명한 한계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정책 결정의 전문성 부재, 선동정치에 대한 취약성, 여성·노예·외국인의 배제 등 근대적 관점에서 보면 결코 완전한 민주주의가 아니었던 것이죠. 또한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을 펼치며 폴리스 자치의 이상과 모순을 빚기도 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참패로 폴리스 체제가 와해되면서, 고전기 아테네 민주정의 몰락은 피할 수 없는 귀결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일정 규모 이상으로 비대해진 국가에서 시민의 직접 참여에 기반한 민주정이 가진 취약성이 노정된 것이라 할 수 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테네 민주정이 지닌 불멸의 역사적 의의를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권재민, 법치, 공화주의 전통의 효시로서 근대 민주주의에 이르는 지적 토대를 형성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완전하지는 않았어도,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구현하려 한 폴리스 시민들의 야심찬 실험. 그것이 2천 5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깊은 메시지로 다가오는 까닭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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