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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건국과 통치 체제 정비

OPYEB 2024.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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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건국과 통치 체제 정비


1. 고려의 건국 과정

- 후삼국 시대의 혼란:
  - 신라 말기 군웅할거 시대를 거치며 각지에서 호족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 궁예는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나름대로 후고구려를 세웠지만, 견훤의 후백제, 왕건의 후고려와 각축을 벌여야 했습니다.
  - 세 정권은 한반도 통일을 내세우며 치열한 경쟁을 펼쳤고, 이는 고려에 의한 후삼국 통일로 귀결되었습니다.
- 왕건의 혜안과 포용력:  
  - 고려 태조 왕건은 궁예 밑에서 군사적 수완을 인정받아 대장군에 올랐던 인물입니다.
  - 그는 궁예가 폭정을 일삼자 귀순해 온 신라 왕족 김주원, 복지겸 등을 등용하여 교묘히 궁예를 축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 이어 스스로 왕위에 올라 고려를 세웠으며, 958년에는 후백제마저 격파하고 후삼국을 통합했습니다.
  - 왕건은 적대세력을 회유하고 포용하는 정책으로 국내 기반을 다졌고, 민본 정치와 불교 통치로 民心을 수습했습니다.
- 송과의 관계 정립:
  - 왕건은 고려 건국 직후부터 송과 외교 관계를 맺으려 노력했습니다.
  - 건국 초기에는 송이 고려를 번속국으로 대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서서히 책봉-조공 관계를 확립해 나갔습니다.  
  - 성종 때 송으로부터 '고려국왕' 인정을 받으면서 고려는 명실상부한 중국과 대등한 국가로 부상했습니다.
  - 송과의 안정적 외교 관계 속에서 고려는 한반도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고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2. 광종의 개혁 정치

- 노비안검법 실시:
  - 광종은 즉위 초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호족 세력을 약화시켰습니다.
  - 노비안검법은 호족들이 사병으로 활용하던 노비를 국가에 귀속시키는 조치였습니다.
  - 노비의 역을 국가가 관리하게 함으로써 국가 수입을 확충하고, 호족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려 한 것입니다.
  - 노비안검법은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균전제 실시의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과거제 실시와 유교 교육 진흥:  
  - 광종은 958년 과거제를 처음 실시하여 유교적 학문 교육을 장려하고 인재 등용 방식을 혁신했습니다.
  - 과거는 학문적 능력과 덕행을 기준으로 관료를 선발하는 제도로, 門閥이 아닌 실력이 우대되었습니다.
  - 광종은 개경에 국자감을 세워 관학을 진흥시키고 유교 경전 교육을 주도했는데, 이는 문치주의 전통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 과거제는 고려 정치의 근간을 이루며 고려가 고도로 계층화된 문화 국가로 발전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됩니다.
- 불교 숭앙과 호국불교의 대두:
  - 광종은 왕건에 이어 적극적으로 불교를 후원하고 숭배했습니다.
  - 10여 차례의 옥석궁 불사를 열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친견하는 등 왕실 차원의 불교 행사가 성행했지요.
  - 광종은 현화사를 국사찰로 삼아 불교계를 통제하고 국운을 기원하는 기제로 활용했습니다.
  - 이 시기 대규모 불상 조성, 《대장경》 간행 등이 이뤄지며, 불교가 호국 이념으로 자리 잡아 갔습니다.



3. 성종의 유교 정치와 지방제도 정비

- 독자적 연호 제정과 금인 제작:
  - 성종은 982년 '건봉'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제정하여 고려의 자주성을 과시했습니다.
  - 성종은 또한 '광인'과 '준정'이라는 고유 화폐를 주조해 국가 기반을 다졌는데, 이는 송의 전철을 밟은 것이었습니다.
  - 아울러 대장경을 판각하고, 과거 등급에 따른 임관제를 실시하는 등 유교 정치의 틀을 갖추어 나갔습니다.
  - 이러한 시책을 통해 성종은 고려의 위상을 높였고,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를 굳건히 했습니다.
- 12목 설치와 지방제도 정비:
  - 성종은 전국을 12목으로 나누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통치하는 제도를 시행했습니다.
  - 12목은 각각 안찰사, 도단련사 등의 외관이 파견되어 행정과 사법을 담당했고, 중앙의 명령을 관철시키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 목 아래에는 군현을 두었는데, 수령과 향리층이 지방 행정을 책임졌습니다.
  - 12목-군현 체제는 고려 지방통치제도의 근간이 되었으며, 중앙 집권 체제의 뒷받침이 되었습니다.
- 훈요십조의 반포:
  - 성종은 《훈요십조》를 반포하여 통치자의 덕목과 국정 운영 방침을 제시했습니다.
  - 《훈요십조》는 유교 경전을 토대로 한 덕치와 민본 정치를 강조한 일종의 왕훈이었습니다.
  - '백성은 나라의 근본', '덕으로써 인재를 기르고 법으로써 악행을 막을 것' 등의 조항이 실려 있습니다.
  - 《훈요십조》는 고려 중기 문종에 의해 《훈구십이조》로 개정 반포되어 통치 규범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4. 예종의 개혁과 서경천도

- 노비종모법 시행:
  - 예종은 광종의 노비안검법을 계승하여 노비종모법을 시행했습니다.
  - 노비종모법은 노비 신분을 母系로 규정한 것으로, 노비 수를 줄이고 양인 신분을 늘리려는 취지에서 마련되었습니다.
  - 노비종모법으로 노비 비율이 점차 감소하게 되었고, 이는 고려의 신분제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서희를 통한 거란과의 외교:
  - 예종 때 거란이 1차 침입을 감행하자, 서희가 소손녕과의 외교 담판을 통해 강동 6주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 서희의 담판은 군사력이 아닌 외교적 협상을 통해 위기를 모면한 대표적 사례로 꼽힙니다.
  - 이는 고려가 유연한 대외 정책으로 거란과의 對立을 피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 서경천도의 배경과 의미:
  - 예종은 거란의 1차 침입을 계기로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려 했습니다.
  - 이는 병주와 북진정책을 꾀하기 위한 군사-전략적 고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서경천도는 좌절되고 말았는데, 풍수지리상 개경이 서경보다 우월하다는 게 주된 이유였습니다.
  - 서경천도 계획이 무산된 것은 고려 왕조가 개경에 뿌리내린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습니다.



5. 현종 때의 정치 변동과 문화의 발전

- 전제왕권의 강화:
  - 현종은 즉위 초 국왕 독대제를 실시하여 신하들과 직접 국정을 의논하는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 《고려사》 편찬에 착수하고,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는 등 왕권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 이는 문종 때부터 대두된 7대 호족의 집권을 견제하고, 국왕 중심의 정치 질서를 확립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 최승로의 시무 28조 건의:
  - 1020년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올려 정치 개혁안을 제시했습니다.
  - 그 내용은 간쟁 활성화, 과거제 개선, 불교계 정화 등 시대의 폐단을 시정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 최승로는 특히 도병마사의 혁파를 주장했는데, 이는 호족 및 권문세족 억제를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 〈시무 28조〉는 채택되지는 않았으나, 고려 정치사에서 사대부 관료들의 개혁 의지를 드러낸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 황룡사 9층목탑 건립:
  - 현종 14년인 1027년 경주 황룡사에 9층 목탑이 세워졌습니다.
  - 목탑은 화려한 단청으로 치장되었고, 높이가 80m에 달하는 장대한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 이는 고려가 통일신라의 불교 문화를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물이었습니다.
  - 황룡사 9층목탑은 고려 전기 건축술의 정수로서, 고려 문화의 융성을 알리는 금자탑이 되었습니다.



고려의 건국과 초기 통치체제 정비 과정에서는 왕건과 그 후계자들의 치적이 돋보입니다. 호족 세력 통합, 과거제 시행, 불교 장려 등으로 고려는 안정적 지배 질서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거란의 침입이라는 외환을 슬기롭게 극복한 것도 고려 정치의 저력을 보여주는 대목이었습니다.  
고려는 성종, 현종 대에 이르러 제도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훈요십조》로 대표되는 유교 정치의 이념적 토대가 공고해졌고, 황룡사 9층탑과 같은 걸작들이 창조되었습니다. 고려는 중세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으로 우뚝 섰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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