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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의 문화와 예술

OPYEB 2024.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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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의 문화와 예술


1. 신라 불교 문화의 발전

- 불국사와 석굴암의 조성:
  - 경덕왕 시기인 751년, 경주 토함산에 불국사가 창건되었습니다.
  - 불국사는 가람 배치와 건축술이 뛰어난 사찰로, 다보탑, 석가탑, 극락전 등의 건물이 조화를 이룹니다.
  - 특히 다보탑은 화강암 하나로 조성한 모전석탑으로, 화려한 조각과 세련된 비례가 특징입니다.
  - 불국사와 함께 석굴암도 조성되었는데, 이는 토함산 중턱의 화강암을 파서 만든 인공 석굴 사원입니다.
  - 석굴암에는 세계적인 걸작인 석굴 본존불을 비롯해 보살상, 사천왕상 등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 이들은 신라 예술의 정수로서 동아시아 불교 미술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습니다.
- 화엄사상의 발달:
  - 통일신라 시대 불교계를 주도한 사상은 화엄종이었습니다.
  - 화엄사상은 법화경, 아비달마 등 대승경전을 집대성한 화엄경을 근간으로 합니다.
  - 화엄사상에서는 우주만물이 상호 연관되어 조화를 이룬다는 법계연기, 일즉다 다즉일의 논리를 강조합니다.
  - 신라 의상은 화엄일승법계도를 통해 화엄법계관을 체계화했고, 이는 중국에까지 전파되어 동아시아 불교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 화엄사상은 불일여래회, 화엄벽화 등 불교 미술 분야에서도 중요한 소재로 활용되었습니다.
- 호국 불교의 대두:
  - 통일신라 하대로 가면서 귀족 사회가 동요하고 하층민의 저항이 거세지자, 호국 불교 사상이 확산되었습니다.
  - 호국 불교는 선종을 중심으로 국가와 왕실을 수호하는 방편으로 대두했습니다.
  - 선종은 교종에 비해 수행 방법이 간명하고 실천성이 강조되어 민중들에게 널리 유행했습니다.
  - 도의천, 범일, 보조지눌 등의 승려들은 선종 9산 문파를 형성하며 수선결사운동을 전개했습니다.
  - 이는 불교계 스스로 타락한 현실을 반성하고 수행 정진으로 위기를 타개하려는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도교의 유행과 산신 신앙

- 도선의 활동과 풍수지리설:
  - 통일신라 하대에는 도교 사상이 널리 유행하였는데, 특히 도선의 영향력이 컸습니다.
  - 도선은 중국에서 도교를 배워와 유불도 三敎 융합사상을 설파했고, 풍수지리설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 그는 왕궁, 사찰 건립 시 길지를 점지하는 한편, 왕실의 안녕과 나라의 융성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습니다.
  - 도선은 삼국유사에서 신라 건국 설화를 서술하기도 했는데, 이는 화랑도 전통과 풍수사상을 결합한 것이었습니다.
- 신선 사상의 유행:
  - 신라인들 사이에서는 신선 사상과 장생불사에 대한 동경이 퍼져 있었습니다.
  - 선묘낭도나 남석행과 같은 신선 설화가 성행했고, 진훤이 세운 태봉국도 신선 사상을 내세웠습니다.
  - 신선 사상의 유행은 도참비기 문화로도 이어졌는데, 정씨 정권이 왕건에게 물러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 나아가 신선 사상은 무속 신앙과도 결합하여, 삼신, 칠성 등의 신격을 낳았습니다.
- 산신 신앙의 확산:
  - 통일신라 시대에는 전국 명산에 산신을 모시는 산신 신앙이 크게 일었습니다.
  - 금오산, 지리산, 태백산 등에 산신사가 세워지고 제의가 이뤄졌는데, 이는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 산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접점으로서, 신성한 기운과 생명력의 원천으로 숭배되었습니다.
  - 산신제는 국가적 제의로 발전하여, 조선 시대까지 이어지는 전통이 되었습니다.  



3. 골품제 동요와 민심 이반

- 진골 귀족 사회의 문제점:
  - 통일 후 신라는 골품제에 의해 지배되는 신분제 사회였습니다.
  - 골품제는 혈연에 따라 귀족의 지위가 세습되는 제도로, 진골-6두품-5두품-4두품-평민의 위계로 나뉘었습니다.  
  - 특히 진골 귀족은 politique를 독점하고 부를 축적하면서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었습니다.
  - 6두품 이하 관료들의 비리도 심각했는데, 이들은 백성을 수탈하고 관직을 매관매직하는 등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 6두품 관료와 호족의 성장:
  - 골품 질서가 동요하면서 6두품 출신 관료들이 호족으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 호족들은 지방 세력을 등에 업고 향리를 다스리며 경제력과 武力을 축적해 나갔습니다.
  - 대표적인 호족으로는 궁예, 견훤, 왕건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Later Three Kingdoms을 주도한 인물들이기도 했습니다.
  - 호족의 성장은 귀족 체제의 붕괴를 가속화하는 동시에 지방 문화의 발달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짐승아 금관가야의 봉기:
  - 통일 후기 신라에서는 하층민과 노예들의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 대표적인 사건이 822년에 일어난 '짐승아 금관가야'의 봉기입니다.
  - 과도한 수탈에 시달리던 노예들이 '짐승아'라는 이름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궐기한 것이죠.
  - 이들은 금관가야의 부활을 내세우며 귀족들의 저택과 창고를 습격했습니다.
  - 반란은 1년 만에 진압되었으나, 노예제 모순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4. 학문과 교육의 발달

- 국학의 설립과 운영:
  - 신문왕은 682년 국학을 설립하여 왕족과 귀족 자제들을 교육했습니다.
  - 국학에서는 유교 경전을 비롯해 역사, 문학, 법률 등을 가르쳤습니다.
  - 특히 유교는 귀족 관료 등용의 근간이 되었고, 건국 초기부터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 신라 국학의 전통은 고려의 국자감으로 이어져, 공자묘 석전대제가 치러지는 등 유교 교육의 전당이 되었습니다.
- 독서삼품과의 시행:
  - 원성왕 때인 788년, 독서삼품과가 실시되었습니다.
  - 유교 經典에 대한 이해도를 평가하여 관료를 선발하는 제도로, 과거제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 하품과, 중품과, 상품과로 나뉘었는데 시험 성적에 따라 9品에서 5品까지의 관직을 제수했습니다.
  - 독서삼품과는 門地보다 학문적 능력을 우대하는 방향으로 관료제를 개혁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 청해진 설치와 장보고:
  - 8세기 중엽 신라는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상 무역을 전개했습니다.
  - 장보고는 청해진 무역을 주도한 인물로, 황해와 남해의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권을 장악했습니다.
  - 그는 당과 일본을 오가며 국제 무역을 주도했고, 절강성 明州에 신라방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 장보고는 동북아시아 해상 실크로드를 개척한 무역왕이자, 해양 영토 수호에 힘쓴 민족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5. 여러 문화유산의 창출

- 천마총의 벽화와 유물:
  - 천마총은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대표적인 고분으로, 1973년 발굴되어 화제를 모았습니다.
  - 천마총에서는 말을 탄 기마인물상과 사신도, 주악도 등의 벽화가 발견되었습니다.  
  - 깊고 신비로운 군청색 바탕에 적황색, 녹색 등으로 채색된 벽화는 당대 회화 수준의 높이를 보여줍니다.
  - 또한 금관, 금제 허리띠, 도기 등 1000여 점이 넘는 유물이 출토되어 신라 귀족 문화의 면모를 드러냈습니다.
- 성덕대왕 신종:
  - 성덕대왕 신종은 성덕왕 때인 771년에 제작된 동종으로, 에밀레종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통일신라 때 제작된 동종 가운데 현존하는 유일한 종으로, 보물 제2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높이 3.3m, 무게 19톤의 장대한 규모로 웅장한 음색을 자랑하며, 종신에는 당대 역사와 불교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 성덕대왕 신종은 신라의 뛰어난 주조 기술과 불교 문화를 보여주는 상징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 일연 스님이 1281년 저술한 삼국유사는 신라 시대 설화와 전설을 집대성한 책입니다.
  - 《기이》, 《기이》, 《흥덕》, 《列傳》, 《感通》 등 5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불교와 유교, 도교 사상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 건국 신화, 도미 설화 등 상고시대부터 통일신라 시기까지의 스토리를 망라하고 있어 신라 문화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때 김부식 등이 편찬한 역사서로, 신라본기 · 고구려본기 · 백제본기 · 열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중국 정사체 역사서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객관적 사실 위주로 서술되어 있다는 점이 삼국유사와 다릅니다.




신라는 통일 이​​​​​​​​​​​​​​​​후 삼국을 统一하고 민족 문화의 융성을 이루었습니다. 불교는 호국 이념으로 자리매김했고, 화엄사상과 선종이 발달하며 정신세계를 주도했습니다. 불국사, 석굴암으로 대표되는 불교 미술은 신라 예술의 절정을 보여주었지요.
도교와 산신 신앙도 확산되면서 신선 사상과 풍수지리설이 유행했습니다. 도선의 활약상이 보여주듯 종교 문화가 다채롭게 꽃피었던 시기였습니다.
한편 통일 후기로 가면서 골품제의 모순이 격화되고 민심이 이반되는 조짐도 나타났습니다. 진골 귀족의 부패와 호족의 성장, 노예 봉기 등은 왕권 약화로 이어지는 불안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신라는 학문과 교육의 발전을 지속했습니다. 국학 설립, 독서삼품과 실시 등은 유교적 교양을 갖춘 인재를 배출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장보고로 대표되는 해상 무역의 전개 또한 찬란한 성과로 기록되었습니다.
신라는 수많은 문화유산을 남겼습니다. 천마총 벽화, 성덕대왕 신종 등은 예술적 성취를 보여주는 걸작들입니다. 설화집 삼국유사와 역사서 삼국사기 또한 통일신라의 위대한 서사를 전해주는 지적 유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통일신라는 민족사의 빛나는 한 페이지였습니다.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융성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토대를 닦았기 때문입니다. 신라인들이 이룩한 문화 역량은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며 한국 문명의 꽃을 피우는 뿌리가 되었습니다.
천 년 왕국 신라가 남긴 휘황찬란한 문화유산은 우리 겨레의 영원한 자부심이자 인류 보편의 가치로 빛나고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통일신라사가 주는 교훈은 실로 크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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