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 시대의 문화와 사회
1. 청동기의 도입과 전파
- 청동기 문화의 기원:
- 청동기 문화는 구리와 주석을 혼합해 청동기를 만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 중국 황하 문명에서 청동기 문화가 발달했고, 이후 한반도와 일본열도로 전파되었습니다.
-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시작:
- 한반도에 청동기가 도입된 시기는 기원전 8세기경으로 추정됩니다.
- 요령성 상영자 유적, 랴오닝성 곡가구 유적 등에서 이 시기 청동기가 발굴되었습니다.
- 초기에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청동기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2. 무문토기 문화의 발달
- 무문토기의 등장:
- 한반도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토기가 민무늬토기, 즉 무문토기입니다.
- 무문토기는 표면에 무늬가 없는 점이 특징이며, 굽다리접시, 깊은바리 등의 형태가 주를 이룹니다.
- 무문토기 문화의 확산:
- 기원전 5-기원전 3세기에는 무문토기 문화가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 영남 지역 대성동 고분군, 김해 수가리 유적 등지에서 무문토기가 출토되었습니다.
- 호남 지역에서는 나주 반남 고분군에서 다수의 무문토기가 발굴되었습니다.
3. 지석묘와 고인돌 축조
- 지석묘의 개념과 분포:
- 지석묘는 돌을 쌓아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한 돌을 얹은 무덤 양식을 말합니다.
- 우리나라에서는 고인돌이라 부르며, 세계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습니다.
- 한반도에는 약 3만여 기의 고인돌이 남아있는데, 전남·전북·경남 지역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 고인돌의 구조와 축조 기법:
- 고인돌은 크게 바둑판식, 개석식, 탁자식으로 구분됩니다.
- 바둑판식은 감옥바위를 8각형으로 다듬어 받침돌 위에 올린 형태입니다.
- 개석식은 장방형의 묘실을 덮개돌로 덮은 형태로, 덮개돌의 크기가 압도적입니다.
- 탁자식은 받침돌과 덮개돌 사이에 굄돌을 둔 형태로, 규모가 비교적 작은 편입니다.
- 고인돌의 피장자와 축조 목적:
- 고인돌은 권력자나 지배층의 무덤으로 여겨집니다.
- 고인돌에서 비파형 동검, 거울, 옥기 등 권력의 상징물로 여겨지는 유물들이 발견됩니다.
- 고인돌은 피장자의 영생과 권위를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축조된 것으로 보입니다.
4. 농경의 발달과 사회 변화
- 벼농사의 시작과 확산:
- 기원전 2천년기 무렵 한반도 남부에서 본격적인 벼농사가 시작되었습니다.
- 기후 온난화로 한반도 남부 지역이 벼농사에 적합한 환경이 되었습니다.
- 벼 재배는 식량 생산력을 높여 인구 증가와 사회 발전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 생산력 증대와 사유 재산 출현:
- 농업과 목축의 발달로 잉여 생산물이 늘어나고 사유 재산 개념이 생겨났습니다.
- 군장이 출현하여 경제력과 무력을 바탕으로 마을 단위 정치체를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 이는 후대 고조선, 부여, 진국 등 초기 국가로 이어지는 씨앗이 됩니다.
- 계급사회의 형성:
- 청동기 시대 후기로 갈수록 빈부 격차와 계층 분화가 두드러졌습니다.
- 권력자와 피지배층 간의 차이가 벌어지고, 가족 간 불평등도 고착화되기 시작했습니다.
- 이러한 분화는 이후 삼한 사회에서 본격화되는 계급 분화의 맹아였습니다.
5. 고조선 이전 청동기 사회의 모습
- 초기 국가 형성 이전의 사회:
- 청동기 시대는 아직 국가라 부를 만한 정치체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 씨족 사회에서 부족 연맹 단계로 발전해가는 과도기적 단계였습니다.
- 군장이 부족을 통솔하고, 제사장의 역할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순장 풍습과 영혼 숭배:
- 청동기 시대에는 지배자가 죽으면 종복, 전쟁 포로 등을 함께 묻는 순장 풍습이 성행했습니다.
- 이는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 영혼 불멸에 대한 믿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 무덤에 부장품을 함께 묻어두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자연 숭배와 토테미즘:
- 청동기인들은 태양, 달, 별 등 자연물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 자연에 대한 경외감은 산천 숭배, 조상신 숭배로 표출되었습니다.
- 동물 토템을 숭배하는 토테미즘 신앙도 널리 퍼져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청동기 시대는 농경과 목축의 발달, 계급사회의 맹아가 나타난 시기였습니다. 무문토기로 대표되는 청동기 문화는 삼한 사회로 이어지는 문화적 연속성을 보여주며, 고인돌은 권력과 종교가 결합된 당대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아직 국가 형성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군장 중심의 정치체가 성장하고 씨족 문화가 발달하는 등 국가로 가는 토대를 닦은 시기였습니다. 농업 생산력의 발전은 이후 고조선, 삼한으로 이어지는 역사 발전의 디딤돌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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