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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대외관계와 문화 교류

OPYEB 2024.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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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대외관계와 문화 교류


1. 고려초기의 후삼국 통일과 북진정책

-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일:
    - 935년 왕건은 후백제를 복속시키고, 936년에는 신라를 병합하여 후삼국을 통일했습니다.
    - 고려는 한반도 중심의 통일 국가로 발돋움하게 되었습니다.
- 광종의 북진정책과 영토 확장:
    - 광종은 적극적인 북진정책을 펼쳐 고려의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 938년 청천강 이북의 땅을 되찾았고, 943년에는 발해유민을 받아들여 동북 지역 경영을 공고히 했습니다.
    - 이는 고구려 계승 의식의 발로이기도 했습니다.



2. 거란(요)과의 전쟁

- 1차 거란 침입(993):
    - 거란은 고려의 성장을 견제하고자 993년에 대규모 침공을 감행했습니다.
    - 서희는 외교 담판을 통해 강동 6주를 확보하고 거란군을 물리쳤습니다.
- 2차 거란 침입(1010):
    - 1010년 거란은 소손녕이 이끄는 대군을 보내어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 고려의 현종은 나주로 피난했고, 강감찬이 귀주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어 거란군을 물리쳤습니다.
- 3차 거란 침입(1018):
    - 1018년 거란은 보다 큰 규모의 군대로 3차 침입을 감행했습니다.
    - 강감찬은 행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격파했고, 소손녕은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 이로써 고려는 거란의 침입을 완전히 격퇴하고 영토를 지켜냈습니다.



3. 여진과의 관계와 동북 경영

- 별무반 설치와 여진정책:
    - 고려는 여진족을 제어하고 북방을 방어하기 위해 별무반을 설치했습니다.
    - 별무반은 주로 여진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축구, 씨름 등으로 무예를 연마했습니다.
    - 별무반은 북방 경계에 투입되어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했습니다.
- 동북 9성 축조와 여진족 공략:
    - 고려는 압록강 동쪽 지역에 동북 9성을 축조하여 여진족을 견제했습니다.
    - 1107년에는 윤관이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족을 공략하여 동북 경영을 확고히 했습니다.
- 여진족의 성장과 금 건국:
    - 윤관에 의해 남하한 여진족은 완안부를 중심으로 성장했습니다.
    - 1115년 완안부의 지배자 아구다는 금을 건국하고, 요를 복속시켰습니다.
    - 금의 건국으로 고려는 새로운 대외관계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 고려의 여진정벌과 동녕부:
    - 1121년 윤관은 16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족을 공격했습니다.
    - 이는 잔존 여진세력을 진압하고 고려 세력권을 확대하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 고려는 동녕부를 설치하여 현지 다스리게 함으로써 금과의 교역 창구로 활용했습니다.



4. 금과의 평화-전쟁 교체기

- 고려-금 친선관계 모색:
    - 금 건국 초기에 고려는 전쟁을 피하고 평화관계를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 1117년 인종은 사신을 파견하여 금에 국서를 보내는 등 우호 관계를 모색했습니다.
    - 이후 고려와 금 사이에는 사신 왕래와 교역이 이어졌습니다.
- 2차 동북 9성 축조와 압록강 경계:
    - 1190년대 고려는 압록강 동쪽에 동북 9성을 재건하여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했습니다.
    - 이는 금과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 결국 고려와 금은 압록강을 경계로 확정하는 타협을 했습니다.
- 쌍성총관부 설치와 군사적 대치:
    - 금은 1218년 만주 지역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고려의 북진을 저지했습니다.
    - 이로 인해 양국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군사적 대치 상황이 빚어졌습니다.



5. 몽골의 침략과 강화도 천도

- 몽골의 1차 침입(1231):
    - 몽골은 고려가 금을 도운다는 구실로 1231년에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 고려군은 몽골군에 밀려 수도 개경까지 함락당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 몽골의 2차 침입과 강화도 천도(1232):
    - 1232년 몽골군은 2차 침입을 개시했습니다.
    - 고종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장기전에 돌입했습니다.
    - 강화도는 천혜의 요새로서 오랜 기간 몽골의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 항쟁 30년과 최후 저항:
    -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는 몽골에 대한 저항전을 30년 가까이 계속했습니다.
    - 삼별초는 진도, 제주도 등지에서 독자적인 저항 운동을 펼쳤습니다.
- 강화 체결과 개경 환도(1270):
    - 1259년 몽골의 내홍을 틈타 고려는 강화 교섭을 시작했습니다.
    - 1270년 원종은 몽골과의 강화 조건으로 왕실의 족보를 받치고 왕녀를 보내야 했습니다.
    - 이후 개경으로 환도하며 고려는 몽골의 세력권에 편입되었습니다.



6. 원 간섭기의 고려와 반몽 운동

- 원 간섭기의 지배구조:
    - 원은 고려국왕을 속민으로 임명하고, 정동행성을 설치해 고려를 감독했습니다.
    - 고려 왕실은 족보로 원에 인질로 끌려가 감시를 받았습니다.
    - 권문세족들은 원과 연계하여 권력을 누리며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 반원 운동의 전개:
    - 원의 횡포에 맞서 각지에서 반원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 1270년대 삼별초의 항쟁, 1280년대 김윤후의 난 등이 대표적입니다.
- 공민왕의 반원 개혁:
    - 공민왕은 기철 등 친원 세력을 제거하고 반원 개혁정책을 폈습니다.
    -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영토를 회복하는 등 자주성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 그러나 시대를 앞선 개혁 정책으로 원의 반발을 사 결국 피살되고 말았습니다.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하고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며 융성했지만, 몽골의 침략으로 커다란 시련을 겪었습니다. 30여년의 항쟁으로 고려인의 민족의식이 성장하였고, 공민왕 때 반원 자주화 운동도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원 간섭기를 거치며 고려의 자주성은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권문세족의 횡포로 신분제가 동요하고 농민의 처지는 더욱 악화되었지요. 이러한 모순은 결국 봉건제 모순과 결부되어 고려를 멸망으로 이끄는 토양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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