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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두아르테 데 페론 (María Eva Duarte de Perón, 1919-1952) - 에비타(Evita)로 널리 알려진 아르헨티나의 영부인이자 정치인. 20세기 라틴아메리카 대중영합주의(populism)의 상징적 인물.

OPYEB 2025.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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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두아르테 데 페론 (María Eva Duarte de Perón, 1919-1952) - 에비타(Evita)로 널리 알려진 아르헨티나의 영부인이자 정치인. 20세기 라틴아메리카 대중영합주의(populism)의 상징적 인물.

1. 배우에서 영부인으로

- 가난한 지방 출신의 열혈 배우:
    - 1919년 5월 7일, 에바 두아르테는 아르헨티나 중부 로스 톨도스에서 불륜 관계로 태어났다.
    - 다섯 자매 중 막내로 자라난 그녀는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연기자의 꿈을 키웠다.
    - 1935년, 에바는 연극 오디션을 보기 위해 단신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상경한다.
    - 초기에는 고배를 마셨지만 이내 라디오 드라마를 통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 페론과의 운명적 만남:
    - 1944년 1월, 에바는 한 자선행사장에서 마침내 페론 대령을 만나게 된다.
    - 당시 페론은 군사정권 내각의 노동부 장관이자 군 요직을 겸하고 있는 실력자였다.
    - 에바는 페론의 정치적 야망에 매료되었고, 페론은 그녀의 열정과 카리스마에 끌렸다.
    - 두 사람은 곧 연인이 되었고, 이후 페론의 정치 운명을 함께 했다.
- 선거운동의 첨병이 되다:
    - 1946년 2월, 아르헨티나 대선에 출마한 페론은 에바를 선거운동의 최전선에 내세웠다.
    - 에바는 전국을 돌며 노동자와 서민을 상대로 정치 집회를 이끌었다.
    - 그녀의 연설은 열정적이고 선동적이었으며, 대중들에게 열광적 지지를 받았다.
    - 이는 페론의 압도적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에바는 아르헨티나의 영부인이 되었다.

2. '에비타'로 불리며 권력의 정점에 서다

- 노동자와 여성의 수호자로 나서다:
    - 에바는 페론 정권 하에서 노동부 장관직을 사실상 장악했다.
    - 그녀는 노동조합과의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고,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 주 40시간 노동제, 유급휴가제, 산재보험 등 일련의 노동법안 통과를 주도했다.
    - 또한 여성참정권 쟁취에도 앞장섰는데, 이는 1947년 아르헨티나 여성참정권 획득으로 결실을 맺었다.
- 자선사업과 복지정책 확대:
    - 1948년, 에바는 자신의 이름을 딴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한다.
    - 이 재단은 빈민층을 위한 의료 서비스, 주택 제공, 아동 복지 등의 사업을 펼쳤다.
    - 에바는 전국을 순회하며 빈민가를 찾아 구호물자를 전달하는 등 서민들과 직접 소통했다.
    - 이러한 활동은 페론 정권의 인기를 급상승시켰고, 에바를 '에비타'로 신격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 아르헨티나 제1의 여성으로 부상:
    - 에바의 영향력은 페론 못지않게 막강해졌고, 그녀는 정치적 결정에 깊숙이 관여했다.
    - 각료 임명에서부터 외교 정책에 이르기까지 에바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 당시 언론들은 에바를 두고 '대통령의 아내가 아니라 대통령 자신'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 심지어 1951년 대선에서 부통령 후보로까지 거론되었으나, 보수 세력과 군부의 반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3. 투병과 조기 서거, 그리고 신화화

- 불치병 선고와 정계 은퇴:
    - 1950년, 에바는 자궁경부암 진단을 받았다.
    - 병세가 악화일로를 걸었지만 에바는 대외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 그러나 1951년 11월, 에바는 더이상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1952년 6월 4일, 부통령 후보직 사퇴를 발표했으며 병상에 눕게 되었다.
- 33세의 짧은 생에 마침표를 찍다:
    - 1952년 7월 26일, 에바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통령 궁에서 생을 마감했다.
    - 그녀의 죽음은 전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200만 명 이상이 조문 행렬에 동참했다.
    - 에바의 시신은 아르헨티나 노동조합총연맹(CGT) 본부에 안치되었다.
    - 페론은 에바의 시신을 보존처리하여 대통령 궁에 봉안할 계획이었으나, 1955년 쿠데타로 실현되지 못했다.
- 죽음 이후에도 이어진 신화:
    - 에바 사후 아르헨티나 군부는 그녀의 시신을 유럽에 은밀히 옮겼다.
    - 시신은 16년간 행방불명되었다가 1971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발견되었다.
    - 1976년 페론의 유해와 함께 아르헨티나로 송환되어 부에노스아이레스 레콜레타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 에바의 전설은 사후에도 계속 되었으며, 그녀는 아르헨티나의 성자이자 여성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4. 대중영합주의 정치의 상징

- 포퓰리즘의 여성적 변용:
    - 에바는 남편 페론과 함께 아르헨티나 대중영합주의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 카리스마와 동정심을 앞세워 소외계층을 정치적으로 동원한 전형적 포퓰리스트였던 것이다.
    - 특히 에바는 대중영합주의의 여성적 변용을 보여주었다. 여성과 어머니로서의 이미지를 십분 활용한 것이다.
    - 동시에 에바는 전통적 젠더 역할을 뛰어넘어 여성의 정치적 역량을 과시하기도 했다.
- 에바 신화의 정치적 활용:
    - 에바는 죽음 이후에도 페론주의의 상징으로 살아있었다.
    - 1960-70년대 좌파 페론주의자들은 에바를 혁명적 페미니즘의 아이콘으로 내세웠다.
    - 반면 우파는 에바의 대중영합주의를 경계하며 권위주의로의 회귀를 꾀하기도 했다.
    - 에바를 둘러싼 정치적 공방은 페론주의의 분화와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 신자유주의 시대의 에바 신드롬:
    - 1990년대 이후 아르헨티나는 극심한 경제위기와 사회 혼란에 시달리게 된다.
    - 이 과정에서 에바에 대한 향수가 다시금 부활하게 되었다.
    - 경제적 양극화와 사회적 배제가 심화되자 에바가 상징하는 민중주의가 재조명된 것이다.
    - 2000년대 들어서는 에바를 넘어 '크리스티나 신드롬'이라 불리는 대중영합주의 정치가 등장하기에 이른다.

5. 에바 페론 신화의 빛과 그림자

- 문화적 아이콘으로 기억되다:
    - 에바의 삶은 각종 문화 콘텐츠의 단골 소재가 되어왔다.
    - 1976년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 '에비타'는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했다.
    - 1996년 에는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가 개봉되어 에바 신화를 재확산시켰다.
    - 오늘날 아르헨티나에서 에바는 한 시대의 우상이자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기억되고 있다.

 

 

'대통령보다 권력 있는 영부인'이자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 아르헨티나 현대사를 관통하는 에바 페론 신화의 요체다. 그녀의 삶은 짧았지만 강렬했으며, 대중들의 상상력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정치 무대에 우연히 던져졌지만 천부적 카리스마로 아르헨티나의 운명을 뒤흔들었던 전설의 여인. 신분 상승과 출세의 욕망으로 얼룩진 야심가이자, 소외된 민중의 고통을 어루만진 성자. 에바 페론의 이미지는 양가적이며 때로는 모순적이다.
하지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그녀야말로 라틴아메리카 포퓰리즘이 낳은 최고의 여성 정치인이었다는 점이다. 전통적 가부장제에 도전장을 내민 페미니스트이자, 강자에 맞선 약자의 수호신. 그런 에바의 초상은 대중영합주의의 명암을 동시에 드러낸다.
에바 페론이라는 신화 자체가 아르헨티나 정치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과 당파적 각축은 페론주의가 남긴 유산인 동시에 아르헨티나가 넘어서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에비타를 사랑하고 증오한 한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에바 이후에도 그녀의 망령은 아르헨티나 곳곳을 떠돌고 있다. 현대 아르헨티나 정치사는 어쩌면 에바의 '유령'과의 동행이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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