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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스피에르 (Maximilien Franç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1758-1794) - 프랑스 혁명의 중심인물이자 공포정치로 악명 높은 자코뱅파의 수장. 과격한 혁명 이상주의자로서 프랑스 혁명의 영웅이자 악당으로 평가받는 논쟁적 인물이다.

OPYEB 2025.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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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스피에르 (Maximilien Franç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1758-1794) - 프랑스 혁명의 중심인물이자 공포정치로 악명 높은 자코뱅파의 수장. 과격한 혁명 이상주의자로서 프랑스 혁명의 영웅이자 악당으로 평가받는 논쟁적 인물이다.

1. 변호사에서 삼부회 의원으로

- 변호사로 출발하다:
    - 1758년 5월 6일,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 아라스의 변호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할머니를 여의고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다.
    - 천재적 성적으로 루이르그랑 중학교와 파리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고 계몽사상을 받아들이며 진보적 지식인으로 명성을 얻었다.
- 삼부회 의원에 선출되다:
    - 1788년 재정위기에 직면한 루이 16세가 삼부회 소집을 결정하자, 로베스피에르는 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 평민을 대변하는 연설로 두각을 나타낸 그는 1789년 5월 아라스 지역구에서 제3신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 베르사유에 도착한 로베스피에르는 제3신분 의원들과 함께 테니스코트의 서약을 주도하며 국민의회 수립에 앞장섰다.
    - 8월, 봉건제 폐지령에 이어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발표하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 급진 혁명파 자코뱅클럽에서 활약하다:
    - 로베스피에르는 국민의회 내 급진파 의원들의 모임인 자코뱅클럽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
    - 그는 기록적인 연설과 논설로 자코뱅파의 입지를 강화해나갔다.
    - 특히 국왕 루이 16세의 거부권을 철폐하고 입헌군주제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며 공화정을 향한 밑그림을 그려갔다.
    - 1791년 샹드마르스 광장 발포 사건 이후 로베스피에르는 급진 민주파의 대표주자로 부상했다.

2. 국민공회에서 공화정으로

- 입법의회 의원으로 활약하다:
    - 1791년 10월 신헌법에 따라 입법의회가 구성되자, 로베스피에르는 파리에서 당선되었다.
    - 그는 왕정 타도와 급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자코뱅파의 입장을 대변했다.
    - 1792년 4월 혁명전쟁이 발발하자, 로베스피에르는 전쟁을 국왕 타도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
    - 전세가 불리해지자 그는 국왕 퇴위를 주장했고, 결국 8월 10일 튈르리궁이 함락되면서 루이 16세는 퇴위하고 말았다.
- 국민공회 의원이 되다:
    - 1792년 9월, 입법의회를 대신할 국민공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 로베스피에르는 파리에서 압도적 지지로 국민공회 의원에 선출되었다.
    - 공화정 수립을 결의한 국민공회에서 그는 곧바로 루이 16세 처형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 결국 1793년 1월 21일,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자코뱅파의 주도로 루이 16세는 처형되기에 이른다.
- 공안위원회에서 실력을 발휘하다:
    - 1793년 4월, 국민공회는 행정권을 담당할 12인의 공안위원회를 구성했다.
    - 로베스피에르는 공안위원에 선출되어 점차 지도력을 발휘해나갔다.
    - 10월에는 마라가 암살당하고 당통이 체포되면서 자코뱅파 내에서 로베스피에르의 위상은 절대적이 되었다.
    - 대내외 위기 속에서 로베스피에르는 공안위원회의 결정권을 장악하고 권력을 집중시켜갔다.

3. 공포정치의 광풍을 휘몰아치다

- 지롱드파의 숙청:
    - 1793년 6월, 로베스피에르는 온건 공화파인 지롱드파를 축출하는 데 앞장섰다.
    - 그는 지롱드파가 혁명의 적이며 국민의 적이라고 선동했다.
    - 결국 6월 2일, 지롱드파 의원 29명이 체포되었고 10월까지 모두 처형되었다.
    - 이로써 국민공회 내에서 자코뱅파는 독점적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다.
- 대량 처형으로 공포정치를 자행하다:
    - 1793년 9월, 로베스피에르는 공안위원회를 통해 혁명재판소의 권한을 대폭 강화했다.
    - 이로써 반혁명 행위에 대한 즉결 처형이 가능해졌고, 이른바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 1793년 10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파리에서만 약 2,600명이 처형되었다.
    - 처형 대상은 귀족은 물론 지롱드파, 당통파, 에베르파 등 온건파까지 확대되어갔다.
- 국가 차원의 신앙 창출을 시도하다:
    - 1794년 5월, 로베스피에르는 '최고존재의 축제'를 개최하고 '이성의 여신상'을 불태웠다.
    - 그는 기독교를 대신할 '최고존재교'를 국교로 만들고자 했다.
    - 이는 이성을 신봉하던 계몽주의 정신과 결별하고, 국가가 종교까지 장악하려 한 것이었다.
    - 그러나 이 시도는 많은 이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로베스피에르의 독재에 대한 반대여론을 키우는 빌미가 되고 말았다.

4. 테르미도르의 반동과 단두대 위에서

-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반대세력의 형성:
    - 1794년 7월, 샤메트 추종자들과 당통파의 처형을 계기로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반감이 폭발했다.
    - 군부의 카르노, 평민 출신 의원 탈리앵 등이 로베스피에르 타도에 나섰다.
    - 공포정치에 피로감을 느낀 의원들 사이에서도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 7월 26일, 로베스피에르가 연단에 오르자 의원들은 "독재자 타도!"를 외치며 야유를 보냈다.
- 테르미도르 9일, 로베스피에르의 몰락:
    - 1794년 7월 27일(공화력으로 테르미도르 9일), 국민공회는 로베스피에르 일파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가결했다.
    - 로베스피에르 지지자들이 봉기를 시도했으나, 국민공회군에 의해 진압당했다.
    - 로베스피에르는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다음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 로베스피에르의 처형으로 혁명의 테르미도르 반동이 시작되고, 자코뱅 정권은 종말을 고했다.
-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평가와 그의 유산:
    - 로베스피에르는 순수한 혁명 이상주의자였지만, 결과적으로 공포정치의 원흉이 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 "자유인들의 독재"를 내세웠던 그의 정치노선은 오늘날에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 그러나 그가 주창한 보통선거, 누진세 등 민주공화정의 이념은 이후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 로베스피에르의 몰락은 프랑스 혁명의 한 전환점이 되었고, 나폴레옹의 집권을 예고하는 신호탄이 되기도 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민중의 이상을 추구하며 순수한 열정으로 살다간 비운의 혁명가였다. 그의 고결한 삶과 청렴한 인품은 시대를 초월한 찬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가 불러온 무자비한 공포정치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폭력의 악몽으로 기억된다.
로베스피에르의 이념과 행동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에도 분분하지만, 프랑스 혁명에서 그가 남긴 족적만큼은 결코 지워질 수 없을 것이다. 혁명의 순수한 이상이 독선과 광기로 전락하는 위험성에 대한 경종. 이것이 로베스피에르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일지 모른다.
급진 민주주의의 이상과 공포정치의 독재. 이 모순적 유산을 통째로 안고 살다 간 로베스피에르.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시대의 소용돌이를 그대로 응축해 보여준다. 혁명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로베스피에르의 생애는 한 시대의 아이러니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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