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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소네 야스히로 (中曾根 康弘, Nakasone Yasuhiro, 1918-2019) - 일본의 정치인. 자민당 소속으로 제71-73대 총리를 역임하며 1980년대 일본의 정계를 이끈 대표적 보수 정치인이다.

OPYEB 2025.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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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소네 야스히로 (中曾根 康弘, Nakasone Yasuhiro, 1918-2019) - 일본의 정치인. 자민당 소속으로 제71-73대 총리를 역임하며 1980년대 일본의 정계를 이끈 대표적 보수 정치인이다.

1. 군국주의 시대를 살다

- 해군 장교로 태평양 전쟁을 겪다:
    - 1918년 5월 27일, 나카소네는 군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 1941년 일본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
    -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 구축함 근무를 시작으로 해군 장교로 복무했다.
    - 1945년 5월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 종전 때까지 해군 중위로 있었다.
- 전후 정치가의 길을 걷다:
    - 전쟁 패배 후 나카소네는 해군을 떠나 도쿄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 정계 입문을 결심한 그는 1947년 중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 이후 1950년대에 자유민주당에 입당하여 정치 경력을 쌓아갔다.
    - 1960-70년대 다카야마현 선거구에서 내리 8선을 하며 당내 입지를 다졌다.

2. 보수본류로 부상하다

- 다나카 내각과 삼목회의 주역:
    - 나카소네는 1970년대 초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 밑에서 정무차관을 지냈다.
    - 다나카와 함께 자민당 내 '다케시타파'의 핵심으로 활약하며 실력자로 부상했다.
    - 당시 '삼목회'라 불리던 다나카-나카소네-다케시타 라인은 자민당 내 최대 실력파로 군림했다.
    - 다나카 전 총리의 측근이라는 이점을 살려 당내 기반을 착실히 다져갔다.
- 강경파 정치인으로 두각을 나타내다:
    - 1970년대 후반 자민당 정조회장을 지낸 나카소네는 '전위대' 발언으로 주목받았다.
    - 그는 미일 안보동맹을 중시하고 방위력 증강을 주장하는 등 강경 보수 노선을 폈다.
    - 1982년 제2차 스즈키 내각에서 행정관리청장관을 맡아 행정 개혁을 주도했다.
    - 그 해 자민당 총재 경선에 출마했으나 suzuki 젠코에게 패배하고 만다.

3. 나카소네 내각과 일본 정치의 전성기

- 제71-73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다:
    - 1982년 11월 스즈키 총리의 전격 사임으로 나카소네는 제71대 총리에 취임했다.
    - 나카소네 내각은 1987년까지 제73대까지 장기 집권하며 일본 정계를 주름잡았다.
    - 취임 직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을 압승으로 이끌며 안정적 국정 운영의 발판을 마련했다.
    - 방위력 증강, 행정 개혁, 교육 개혁 등을 국정 기조로 내걸었다.
- '전후 정치의 총결산'을 선언하다:
    - 1985년 8월, 나카소네는 전후 40주년 기념사에서 "전후 정치의 총결산"을 선언했다.
    - 그는 평화헌법 개정, 자위대 역할 확대, 교육의 국가주의화 등을 제시했다.
    - 이는 전후 평화주의 노선으로부터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국내외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 나카소네의 민족주의 성향은 일본의 '새로운 보수주의' 부상과 맞물리며 우경화의 신호탄이 되었다.
- 레이건, 대처와 함께한 강력한 지도력:
    - 나카소네는 영미권 국가들과의 유대 강화에 힘썼다.
    - 특히 레이건 미국 대통령, 대처 영국 총리와 개인적 친분을 쌓으며 긴밀한 협력 관계를 과시했다.
    - 1983년 미국을 방문해 레이건과 '론-야스' 회담을 가졌고, 일미 관계의 황금기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 대처와도 각별한 유대를 과시했는데, 이는 신보수주의 동맹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4. 정계 은퇴 후에도 영향력을 발휘하다

- 1990년대 이후 원로 정치인으로 군림:
    - 1990년 중의원 선거 패배로 총리직에서 물러난 나카소네는 여전히 자민당의 실력자로 군림했다.
    - 측근 가이후 도시키를 후계자로 내세우는 한편, 당내 파벌 정치의 핵심에 있었다.
    - 1990년대 중후반에는 자민당 내 헌법조사회장을 맡아 개헌론을 주도하기도 했다.
    - 나카소네파는 한때 100명이 넘는 당내 최대 파벌로 약진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 정계 은퇴 후에도 우익 색채를 드러내다:
    - 2003년 정계 은퇴 이후에도 나카소네는 보수 우익 인사로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 야스쿠니 신사 참배, 군 위안부 강제동원 부인 발언 등으로 국내외 물의를 빚기도 했다.
    - 2010년에는 초당파 의원연맹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는 의원 동맹'의 최고고문을 맡았다.
    - 고령에도 불구하고 개헌 실현을 향한 집념을 보여주었다.
- 101세로 타계하다:
    - 나카소네는 2019년 11월 10일 10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 당시 아베 신조 총리는 나카소네를 "전후 일본 정치를 작정한 거인"이라고 애도했다.
    - 전후 최장수 총리로 장수와 불굴의 정치인生을 보여준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5. 나카소네 시대의 빛과 그림자

- 新보수주의 시대를 연 선구자:
    - 80년대 나카소네 내각은 일본 보수화의 신호탄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자위대 역할 확대, 교육 국가주의화 등은 이후 우경화 흐름의 토대가 되었다.
    - 특히 '전후 정치 총결산' 선언은 평화헌법 체제로부터의 이탈을 예고한 것이었다.
    - 오늘날 아베 내각의 보수 강경책은 상당 부분 나카소네 시대에서 연원한다고 볼 수 있다.
- 자민당 파벌 정치의 절정기:
    - 나카소네 총리 시절은 자민당 1강 체제가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 당시 삼목회로 불린 다나카-나카소네-다케시타 라인은 20세기 후반 일본 권력의 핵심부를 차지했다.
    - 그러나 이들이 주도한 파벌 정치는 부정부패와 정관재 문제의 근원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 특히 나카소네는 측근 의원들의 비리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 경제 활성화와 재정 건전성 악화의 양면성:
    - 나카소네 내각 시절 일본 경제는 높은 성장세를 구가했다.
    - 엔고를 기조로 한 '나카소네 노믹스'는 내수 진작과 수출 호조로 이어졌다.
    - 그러나 재정 지출 확대로 인한 국가 채무 증가는 이후 일본 장기 불황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 성장 우선주의가 빚어낸 '거품경제'가 결국 일본 경제의 발목을 잡게 된 것이다.

 

 

전후 보수정치의 거목이자 '정치 9단'으로 불린 나카소네 야스히로. 그는 일본 보수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인 동시에 현대 일본 정치사의 명암을 집약한 인물이었다. 신보수주의 시대를 연 선구자로서 나카소네의 역할은 결코 작지 않다. 그의 우파적 국가주의는 21세기 일본 정치에도 면면히 흐르고 있다. 평화헌법 개정이나 자위대 역할 확대 등은 오늘날에도 뜨거운 정치 쟁점으로 남아 있다. 그런 점에서 나카소네는 일본 보수세력의 정신적 지주로 기억될 만하다.
반면 파벌 정치의 폐해와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지 못한 한계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나카소네 시대는 일본 특유의 정관재 문제가 고질화된 시기이기도 했다. 성장 위주 경제정책의 후유증도 적지 않다. 재정 건정성 악화와 거품경제의 붕괴는 이후 '잃어버린 20년'의 명암으로 이어졌다.
101세 생애를 마감한 나카소네. 그의 정치적 유산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지만 전후 일본의 자화상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창이 되기에 충분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정치 거인의 빛과 그림자는 현대 일본 정치의 자장 안에 켜켜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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