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고르바초프 (Mikhail Sergeyevich Gorbachev, 1931-2022) -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이자 개혁ㆍ개방 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주도한 정치인. 냉전 종식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1. 스타브로폴의 농민에서 모스크바의 정치인으로
- 소련 남부의 농촌에서 태어나다:
- 고르바초프는 1931년 3월 2일, 소련 남부의 스타브로폴 지방 프리볼노예 마을에서 태어났다.
- 부모인 세르게이 고르바초프와 마리아 고르바초바는 집단농장(콜호스)에서 일하는 농민이었다.
- 어린 시절 고르바초프는 독일군의 점령과 스탈린 시대의 탄압을 목격하며 자랐다.
- 모스크바 대학 법학부에 입학하다:
- 1950년, 고르바초프는 우수한 성적으로 모스크바 대학 법학부에 입학한다.
- 대학 시절 그는 열성적인 공산당원으로 활동하며 동료 라이사 티토렌코와 결혼한다.
- 1955년 대학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간 고르바초프는 콤소몰(공산청년동맹) 간부로 정치 활동을 시작한다.
- 공산당 서기로 빠르게 승진하다:
- 1970년, 고르바초프는 만 39세의 나이로 스타브로폴 변강 당 제1서기가 된다.
- 당 중앙의 눈에 들어온 그는 1978년 모스크바로 발탁되어 중앙위원회 서기에 오른다.
- 1980년 정치국 후보위원, 1985년 서기장에 오르며 소련 권력의 핵심부로 진입한다.
2. 개혁과 개방의 수장, 그리고 아쉬운 퇴장
- 페레스트로이카의 시작:
- 1985년 3월,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최고지도자인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다.
- 그는 경제 재건과 사회 개혁을 위해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제창하며 변화를 모색했다.
- 관료주의 타파, 기업의 자율성 확대 등을 골자로 한 개혁은 초기에 큰 호응을 얻었다.
- 글라스노스트와 동구권의 해빙:
- 고르바초프 시대의 또 다른 핵심 기조는 '글라스노스트'(개방)였다.
- 그는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대폭 확대하고 서방과의 교류에도 적극적이었다.
- 이는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이어지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 쿠데타 사태와 고르바초프의 퇴장:
-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보수파의 반발에 부딪혔고, 경제난으로 인해 민심도 악화일로를 걸었다.
- 1991년 8월, 공산당 강경파가 쿠데타를 일으키며 고르바초프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 옐친 러시아 대통령의 지지에 힘입어 쿠데타는 좌절되었지만, 소련의 해체 과정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 결국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는 소련 해체를 선언하고 대통령직에서 사임한다.
3. 노벨평화상 수상과 정치 은퇴 후의 삶
- 세계인의 사랑을 받다:
- 고르바초프는 퇴임 직후인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 냉전의 종식, 핵군축 협상 타결 등 세계 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 이후에도 고르바초프는 환경운동,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세계적인 존경을 받았다.
- 정치 재개 시도와 실패:
- 1996년 고르바초프는 러시아 대선에 출마해 정치권 복귀를 시도한다.
- 그러나 선거 결과는 참담해 득표율 1%도 되지 않는 졸전을 면치 못했다.
- 이후 고르바초프는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평화 운동과 환경 운동에 매진했다.
- 푸틴 정권에 대한 우회적 비판:
- 노년의 고르바초프는 푸틴 대통령의 강권 통치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피력해왔다.
- 특히 크림반도 합병 등 과거 소련 영토의 무력 병합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 다만 푸틴에 대한 직접적 비난은 자제하는 등 우회적 방식을 취했는데, 이는 정치적 영향력의 한계를 실감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 2022년 8월 30일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의 한 병원에서 9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이상과 같이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련과 동구 공산권의 해체라는 역사적 대전환을 이끈 인물로 기억된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공산주의 제국'의 평화로운 퇴장을 연출한 개혁가였던 것이다. 다만 소련 내부의 시각에서 보면 평가가 엇갈리는 것도 사실이다. 초강대국의 지위를 스스로 내려놓고 혼란과 분열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는 푸틴 집권 이후 강해진 민족주의적 정서와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전 세계인의 기억 속 고르바초프는 여전히 평화와 개혁의 아이콘으로 남아있다. 3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가 그의 이름을 존경과 경의를 담아 되새기는 이유다. 철의 장막을 걷어내고 냉전을 종식시킨 용기 있는 정치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품었던 개혁과 평화의 꿈은 다시금 되새겨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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