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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2월 혁명과 나폴레옹 3세의 등장 (1848년 ~ 1852년)

OPYEB 2024.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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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2월 혁명과 나폴레옹 3세의 등장 (1848년 ~ 1852년)


1. 2월 혁명의 배경과 원인

- 7월 왕정의 위기와 경제적 모순:
    - 1830년 7월 혁명으로 수립된 루이 필리프 정권은 초기의 개혁 기조를 버리고 보수화되었습니다.
    - 선거권을 최고액 납세자에게만 부여하는 등 소수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대변하는 체제로 전락했죠.
    - 경기 침체와 농업 위기로 서민들의 불만이 커져가는 가운데, 진보 세력의 개혁 요구가 빗발쳤습니다.
- 자유주의 야당과 노동자 운동의 대두:  
    - 의회 내 야당세력은 선거권 확대와 언론·집회의 자유를 요구하며 정부를 압박했습니다.
    - 한편 산업화의 진전으로 노동자들의 처지가 악화되자, 노동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했죠.
    -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주의자 동맹을 결성하고 혁명을 모색한 것도 이 무렵입니다.
- 정부의 개혁 반대와 정국 악화:
    - 개혁 요구가 빗발치자 기조 왕당파는 개혁론자들을 내각에서 축출하고 완강히 버텼습니다.
    - 언론·집회 탄압, 개혁파 지도자 체포 등 전제적 통치 기조를 이어갔죠.  
    - 정국이 경색되고 혼란이 가중되자, 야당은 반정부 운동의 기치를 높이 들었습니다.



2. 2월 혁명의 전개와 제2공화정의 수립

- 개혁파의 개혁 연회와 봉기:
    - 1848년 2월 22일 파리에서는 야당 주도로 대규모 개혁 연회가 개최되었습니다.
    - 이는 사실상 반정부 시위로, 군중들은 가두행진을 벌이며 개혁을 요구했죠.
    - 정부가 무력 진압에 나서자 24일에는 본격적인 무장봉기로 확전되었습니다.
- 루이 필리프의 퇴위와 공화정 선포:
    - 봉기대는 바리케이드를 쌓고 루이 필리프의 퇴위를 요구했습니다.
    - 정국이 악화일로를 걷자 왕은 2월 24일 왕위를 포기하고 영국으로 망명하고 말았죠.
    - 정권을 장악한 혁명 세력은 즉각 공화정 체제를 선포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했습니다.
- 제2공화정의 출범과 6월 봉기:
    - 제2공화정은 보통선거에 기초한 공화정을 표방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부르주아 중심의 체제였습니다.
    - 노동자들의 생존권 요구가 수용되지 않자, 급진 세력은 6월 봉기를 일으켰죠.
    - 그러나 이는 군부에 의해 유혈진압되었고, 보수 세력 중심으로 정국이 재편되었습니다.



3. 루이 보나파르트의 등장과 제2제정

- 루이 보나파르트의 대통령 당선:
    - 1848년 12월, 루이 보나파르트가 압도적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 그는 나폴레옹 1세의 조카로, 나폴레옹의 영광을 되살리겠다며 민심을 훑었죠.
    - 진보-보수 간 정쟁으로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강력한 리더십에 대한 대중적 열망이 그에게 쏠린 것입니다.
- 쿠데타와 황제 즉위:
    - 대통령 임기 연장이 좌절되자, 루이 보나파르트는 1851년 12월 2일 쿠데타를 단행했습니다.
    - 의회를 해산하고 반대파를 체포한 뒤, 국민투표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죠.
    - 이듬해 11월에는 또 다른 국민투표를 통해 황제에 즉위, 나폴레옹 3세로서 제2제정의 막을 열었습니다.  
- 보나파르티즘의 정치 기반:
    - 나폴레옹 3세 통치 체제는 보나파르티즘으로 규정됩니다.
    - 의회와 법의 지배 등 공화주의 형식을 빌리되, 실제로는 국민투표로 정당화된 전제적 황권에 기댄 것이죠.
    - 농민들과 루펜 프롤레타리아트, 자본가 계급의 일부가 보나파르티즘의 계급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4. 2월 혁명의 성격과 한계

- 시민군주정에서 보나파르티즘으로:
    - 2월 혁명은 절대왕정의 부활을 막고 입헌군주정을 수립했다는 점에서 1830년 7월 혁명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 그러나 시민군주정의 부르주아적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보나파르티즘의 독재로 귀결되고 말았죠.  
    - 프랑스 시민사회의 미성숙과 계급 역학의 불안정, 그리고 혁명 운동 내 분열상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 1848년 혁명의 일환으로서의 성격:  
    - 한편 2월 혁명은 1848년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혁명의 물결 속 하나의 고리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사회주의 이념이 뒤섞인 이 운동의 흐름은 구체제를 뒤흔드는 거대한 도전이었죠.
    - 비록 2월 혁명은 좌절되고 말았지만, 자유·평등·민주의 기치를 유럽에 각인시킨 혁명의 불씨였음은 분명합니다.
- 혁명운동 내부의 한계와 분열:
    - 2월 혁명의 실패는 프랑스 혁명운동 내부의 이념적·노선적 분열상과도 무관치 않습니다.
    -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노동자 계급 간 이해관계의 상충, 급진파와 온건파의 노선 차이 등이 운동의 동력을 약화시켰죠.  
    - 특히 6월 봉기의 유혈진압으로 상징되는 노동자 투쟁의 좌절은 이후 운동에 적잖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2월 혁명은 1789년, 1830년에 이은 프랑스 혁명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됩니다. 구체제에 맞선 자유주의·공화주의 세력과 생존권을 요구한 노동자들의 봉기였던 셈이죠. 비록 루이 보나파르트의 등장으로 좌절되긴 했지만, 유럽 자유주의 혁명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2월 혁명은 산업자본주의 모순 속에서 새롭게 대두한 사회적 주체, 즉 노동자 계급의 역량이 본격적으로 발현된 계기였습니다. 자유주의적 시민권 획득을 넘어 실질적 생존권 쟁취를 내건 이들의 요구는 이제 더는 외면할 수 없는 시대적 화두로 부상했습니다.
물론 6월 봉기의 비극에서 보듯 근대 민주공화정을 향한 노동자들의 꿈은 처참히 좌절되고 맙니다. 아직은 역사의 주인공으로 우뚝 설 역량이 부족했던 탓이겠죠. 하지만 이는 보다 조직적이고 전투적인 계급운동으로 발전해갈 불씨가 되기도 했습니다.  
한편 2월 혁명 이후 전개된 과정은 19세기 중반 프랑스, 나아가 서유럽 정치사의 복잡다단한 역학관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여전히 건재한 보수 세력과 자본가 계급의 기득권, 급진-온건으로 양분된 공화파의 내적 분열, 강력한 리더십을 갈망한 농민과 루펜의 심리.  
루이 보나파르트의 집권은 바로 그 복합적 역학관계의 귀결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민주공화정의 형식을 빌린 전제정, 국민들의 열망을 bonapartism으로 봉합한 체제. 이는 근대 유럽의 정치 역사가 간직한 양가성과 역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1789년의 신화, 1830년의 열정에 이어 1848년의 비극. 프랑스의 2월 혁명은 구체제에 맞선 인민의 저항이 가진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좌절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자유·평등·우애의 기치는 인류 보편의 열망으로 계승되었습니다. 완성되지 못한 꿈을 향한 여정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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