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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지역의 탈식민 민족운동과 근대 국가 수립 (1920년대 ~ 1940년대)

OPYEB 2024.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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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지역의 탈식민 민족운동과 근대 국가 수립 (1920년대 ~ 1940년대)


1. 아랍 민족주의의 태동과 오스만 제국의 붕괴

- 아랍 각성운동의 전개:
    - 19세기 후반 이래 시리아, 이집트 등지에서는 서구 문물에 자극받은 아랍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아랍 민족의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 이들 지식인들은 범아랍 정체성을 환기시키며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과 통합을 꿈꾸었죠.
    - 1916년 메카의 후세인 샤리프가 오스만에 반기를 든 아랍 대반란은 영국의 지원을 업은 민족해방 투쟁이었습니다.
- 오스만 제국의 해체와 아랍 분할 통치:
    - 제1차 세계대전 후 오스만 제국의 패망으로 중동의 정세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 1916년 영불의 사이크스-피코 협정은 기존 오스만 영토의 분할을 규정했는데,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 위임통치령으로, 팔레스타인과 이라크는 영국 관할로 들어가게 되었죠.
    - 아랍인들의 독립 염원과 달리 중동은 또다시 유럽 열강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고, 이는 향후 중동 분쟁의 불씨로 작용했습니다.
- 후세인-맥마흔 협정과 아랍 왕국 건설 좌절:
    - 제1차 대전 중이던 1915년, 영국의 맥마흔은 후세인 샤리프에게 범아랍 왕국 건설을 약속하며 대반란을 선동했습니다.
    - 후세인은 대반란의 성공으로 헤자즈 왕국을 세우는 데 만족해야 했고, 그의 아들 파이살과 압둘라는 각각 이라크와 요르단의 국왕에 봉해졌죠.
    - 그러나 이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고, 실질적인 독립국은 요원한 꿈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2. 이집트 민족운동의 전개와 근대 국가 건설

- 와프드당 결성과 1919년 혁명:
    - 이집트에서는 1918년 사드 자글울 파샤가 민족주의 세력을 규합해 와프드당을 창당했습니다.
    - 제1차 대전 후 파리강화회의 참가를 요구한 그의 주장이 영국에 의해 거부되자, 1919년 3월 전국적 반영 봉기가 일어났죠.
    - 영국군의 유혈진압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저항은 확산되었고, 영국은 이집트 독립 문제를 협상 테이블로 끌고 와야 했습니다.
- 1922년 이집트의 명목상 독립:
    - 이집트 국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한 영국은 1922년 2월 이집트의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 그러나 수에즈 운하에 대한 관할권, 외교·국방에 대한 통제권을 영국이 보유한 채 이뤄진 독립이었죠.
    - 이에 자글울은 영국의 내정 간섭이 지속되는 한 진정한 독립이 아니라며 반발했습니다.
- 근대 입헌군주국의 수립과 와프드당 집권:
    - 1923년 3월 푸아드 1세가 이집트 국왕에 즉위하며 입헌군주제 체제가 출범했습니다.
    - 같은 해 시행된 총선거에서 와프드당이 압승을 거두어 자글울이 수상에 올랐죠.
    - 이후에도 와프드당은 영국의 내정 간섭에 저항하며 이집트 민족운동을 주도해 나갔습니다.



3. 시리아와 레바논의 민족운동

- 프랑스 위임통치와 분리독립 정책:
    - 제1차 대전 후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의 위임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 프랑스는 기독교 마론파가 우세한 레바논 지역을 시리아에서 분리해 자치국을 수립했죠.
    - 이는 이슬람계 아랍인들의 반발을 샀고, 이후 시리아-레바논 관계의 악화로 이어졌습니다.
- 시리아의 반프랑스 투쟁과 독립:
    - 1920년대 시리아에서는 프랑스 식민통치에 맞선 대규모 봉기가 잇따랐습니다.
    - 1925년 술탄 알 아트라쉬가 주도한 드루즈 반란이 대표적인데, 다마스쿠스까지 장악하는 위력을 보였죠.
    - 2차 대전 발발 직후인 1940년,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점령되자 시리아-레바논은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 전후인 1946년 4월 독립이 국제적으로 승인되어, 양국은 명실상부한 주권국가로 출범했습니다.
- 레바논 독립과 국민협약:
    - 1943년 11월, 레바논 의회는 프랑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립과 헌법 개정을 단행했습니다.
    - 마론파 대통령과 이슬람교도 수상의 권한을 규정한 국민협약이 독립헌법의 기초가 되었죠.
    - 이는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간 권력배분을 제도화한 것으로, 종파주의 정치의 단초가 되기도 했습니다.



4. 아라비아 반도 왕국들의 독립  

- 사우디아라비아 건국과 와하브파의 결탁:
    - 1932년 압둘 아지즈 이븐 사우드는 네지드와 헤자즈를 병합해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세웠습니다.
    - 독실한 이슬람 근본주의 종파인 와하브파와 손을 잡았던 사우드 가문은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한 통치를 내세웠습니다.
    - 이는 메카, 메디나 성지를 품에 안은 사우디의 이슬람 지도국 위상과도 결부된 정책이었습니다.
- 걸프만 산유국들의 근대국가 체제 수립:
    - 1930년대 후반부터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7개국 등 걸프 산유국들도 차례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해 갔습니다.
    - 1961년 6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쿠웨이트에는 입헌군주정이 세워졌고, 1971년 독립한 바레인과 카타르도 군주국 체제를 띠게 되었죠.
    - 특히 막대한 석유 자원은 이들 걸프 왕정국가들의 경제적 기반이 되어주었고, 산유국 모델이라는 독특한 정치경제 체제를 가능케 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오스만 제국의 멍에를 벗어난 중동 지역은 본격적인 민족 독립국가 건설을 향한 여정에 돌입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영국, 프랑스 등 제국주의 열강의 신식민지 지배 정책 아래 놓이게 되면서 자주독립의 꿈은 좌절과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아랍 민족주의의 이상과 열강의 분할 통치 현실 사이의 간극, 그리고 이스라엘 건국으로 폭발한 아랍-이스라엘 갈등은 중동 민족운동이 넘어야 할 큰 산이었습니다. 특히 시온주의 세력의 국가수립 야욕과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묵인 속에 자행된 팔레스타인 땅 약탈은 중동 분쟁의 뇌관이자 악순환의 고리로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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