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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수립 (1911년 ~ 1912년)

OPYEB 2024.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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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수립 (1911년 ~ 1912년)


1. 신해혁명의 배경과 동력

- 서세동점과 반청 민족주의의 대두:
    - 19세기 후반 이래 서구 열강의 침탈 속에서 반청 민족주의 운동이 싹텄습니다.
    - 홍수전의 태평천국운동, 캉유웨이와 량치차오의 변법자강운동 등 반청 개혁·혁명 운동이 전개되었죠.
    - 특히 청일전쟁과 의화단사건을 거치며 만주족 왕조의 무능이 적나라하게 폭로되면서 한족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반청 정서가 고조되었습니다.
- 쑨원의 혁명 사상과 동맹회 조직:
    - 근대 서학을 접한 지식인 쑨원은 아시아 최초의 공화정 수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혁명가였습니다.
    - 그는 1905년 도쿄에서 중국동맹회를 조직하고 삼민주의(민족·민권·민생)를 내세우며 공화혁명을 위한 투쟁에 나섰습니다.
    - 동맹회는 국내에 비밀결사 형태로 지부를 확대해 나갔고 청 타도를 위한 무장봉기를 준비해 갔습니다.
- 신군의 창설과 입헌군주제 요구:
    - 청조는 무능을 만회하고 체제를 보위하기 위해 신군 창설에 착수했습니다.
    - 1895년 창설된 북양군벌은 청 황실의 친위대 역할을 했고, 1905년 창설된 八旗군은 만주의 지방군이었죠.
    - 그러나 일본 군사교관들에 의해 훈련된 신군 장교들은 오히려 입헌군주제를 요구하는 개혁 세력으로 변모해 갔습니다.  



2. 우창봉기와 혁명의 전개

- 철로 국유화 조치와 반발:
    - 1911년 5월, 청조는 철로 국유화령을 발표하여 각 성의 철로 건설권과 이권을 중앙 정부로 귀속시켰습니다.
    - 이는 지방의 철로 투자 세력과 신흥 부르주아지의 반발을 초래했죠.
    - 쓰촨 철로 보상 투쟁이 격화되고 전국으로 확산되자, 이를 계기로 반청 세력의 봉기 움직임이 본격화되었습니다.
- 우창신군의 봉기와 혁명 확산:
    - 1911년 10월 10일, 후베이성 우창의 신군이 청나라 황제의 퇴위를 요구하며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 쑨원의 부재 속에서 우창 봉기가 발발하자 황싱, 리위안훙 등 동맹회 세력이 지휘권을 장악했죠.
    - 상하이, 광저우, 난징 등 주요 도시들로 혁명이 확산되자 14개 성에서 청에 대한 독립이 선포되었고 청조의 지배력은 급속히 약화되었습니다.
- 위안스카이의 북양군과 남북의 대치:
    - 청조는 북양신군의 총재 위안스카이를 임시 내각 수상으로 임명하고 사태 수습을 위임했습니다.
    -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이중적 행보를 보이며 황실과 혁명군 사이에서 줄타기를 시도했죠.
    - 결국 청 황제의 퇴위를 수락하는 한편, 자신이 임시 대총통을 맡는 조건으로 혁명 세력과 타협을 모색하기에 이릅니다.  



3. 중화민국의 선포와 임시약법

- 쑨원의 귀국과 남경 임시정부 수립:
    - 우창봉기 직후 쑨원은 귀국하여 남경에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임시 대총통에 취임했습니다.
    - 1912년 1월 1일, 쑨원은 중화민국의 성립을 국내외에 선포했죠.
    - 그러나 정국은 위안스카이와 북양군벌이 장악한 북경 정부와 쑨원의 남경 임시정부가 대치하는 불안정한 남북 분열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 <임시약법> 제정과 삼권분립:
    - 1912년 3월 남경 임시정부는 <중화민국 임시약법>을 제정하여 공화정 헌법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 임시약법은 삼민주의에 입각해 국민의 권리와 자유, 삼권분립, 지방자치 등을 명시했죠.
    - 특히 입법·사법·행정의 삼권분립은 전제정에서 민주공화정으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근대 정치 원리의 도입으로서 중요한 의의를 가졌습니다.
- 위안스카이와의 정권 타협:
    - 그러나 남경 임시정부는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북양군벌 세력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 열세를 인식한 쑨원은 위안스카이에게 임시 대총통직을 넘기고 남경을 떠나는 타협을 선택했죠.
    - 이로써 위안스카이 중심의 북경 정부가 중화민국의 실질적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4. 중화민국 초기 정국의 혼란과 위안스카이 독재

- 국민당의 창당과 쑨원의 재기:
    - 1912년 8월, 쑨원은 국민당을 창당하고 반위안스카이 노선을 분명히 했습니다.
    -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군벌 세력을 앞세워 의회를 해산하고 국민당을 탄압하며 독재 체제를 강화해 나갔죠.
    - 1913년 쑨원 등은 '2차 혁명'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났고, 일본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위안스카이 독재와 제정복고 시도:
    - 1913년 10월 위안스카이는 대총통에 취임하고 군벌과 관료를 움직여 독재체제를 공고히 했습니다.
    - 1915년에는 일본의 '21개조 요구' 수락을 계기로 복벽운동이 일어나자, 오히려 이를 빌미로 황제 즉위를 시도하기도 했죠.
    - 1916년 3월 위안스카이의 급서로 황제 즉위는 무산되었지만, 중화민국의 정국 불안정은 향후 군벌 시대로 이어지는 불안한 유산이 되고 맙니다.
- 신해혁명의 한계와 청산의 과제:
    - 반만주족 한족 민족주의에 기반한 신해혁명은 청 왕조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세웠다는 점에서 근대 중국혁명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 그러나 공화제도의 정착보다는 전제적 독재로의 복귀, 여전한 제국주의 예속과 근대화의 지체 등은 한계로 지적되곤 합니다.
    - 또한 반봉건 토지혁명의 실패, 노동자·농민 등 민중의 소외 등은 중국 근대혁명이 넘어서야 할 숙제로 남게 되었습니다.




신해혁명은 아시아 최초의 반봉건 민주공화혁명이자, 중국 근대사의 출발점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쑨원으로 대표되는 민족·민권 세력의 공화제 수립 투쟁은 근대 중국을 향한 각성과 열망의 표현이었으며, 이후 중국 혁명사에서 면면히 계승될 민주와 통일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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