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푸슈킨 (Aleksandr Pushkin, 1799-1837) - 러시아의 국민 시인이자 근대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작가
1. 푸슈킨 가문과 유년 시절
- 아프리카 혈통 할아버지의 후예:
- 푸슈킨은 1799년 6월 6일 모스크바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 그의 증조할아버지 아브람 페트로비치 한니발은 에티오피아 출신의 흑인 노예 출신으로, 표트르 대제의 총아가 되어 귀족 작위를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 러시아 귀족이면서도 아프리카 혈통이라는 독특한 가계 배경은 푸슈킨의 삶과 예술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 시와 예술이 가득한 집안:
- 푸슈킨의 아버지 세르게이 푸슈킨 또한 프랑스 문학을 사랑한 교양인이었습니다.
- 집안에는 늘 문학과 예술에 대한 대화가 끊이지 않았고, 어린 푸슈킨은 이런 환경에서 재능을 키워갔습니다.
- 특히 프랑스 가정교사로부터 배운 프랑스어와 문학은 푸슈킨의 문학 세계 형성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 시인으로서의 첫 발걸음:
- 문학의 영재였던 푸슈킨은 불과 열 다섯의 나이에 첫 시집을 출간합니다.
- 「리체이의 친구들에게」, 「시인에게」 등 감성적이면서도 풍자적인 시편들이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 이후 푸슈킨은 차르스코예 셀로 리체이에 입학해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받으며 시인의 길로 접어듭니다.
2. 시인에서 정치적 망명객으로
- 반체제 시인으로의 명성:
- 1817년 푸슈킨은 차르스코예 셀로를 졸업하고 외무부 소속 관리로 일하게 됩니다.
- 하지만 그는 관료보다는 문학청년들과 어울리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시를 통해 사회비판적 목소리를 냈습니다.
- 「자유」, 「키시뇨프에서」 등의 시는 전제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한 작품으로 푸슈킨을 반체제 시인으로 각인시켰습니다.
- 남부 유배의 시간들:
- 급진적 시를 문제 삼은 알렉산드르 1세는 1820년 푸슈킨을 러시아 남부로 유배 보냅니다.
- 푸슈킨은 키시뇨프, 오데사 등지를 전전하며 유배 생활을 이어갑니다.
- 이 시기 그는 바이런의 영향을 받은 서사시 「포로」, 「집시들」 등을 발표하며 낭만주의 경향을 보여줍니다.
- 미하일로프스코예 행:
- 1824년 푸슈킨은 오데사 유배지에서 저지른 행패로 인해 고향 근처의 시골 장원 미하일로프스코예로 유배지를 옮기게 됩니다.
- 이곳에서 그는 고요한 시간을 보내며 시와 소설 창작에 매진합니다.
- 푸슈킨에게 유배는 시련이자 예술혼을 불태우는 창작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3. 귀족 작가에서 황제의 시인으로
- 니콜라이 1세의 부름:
- 1825년 12월 14일, 청년 귀족 장교들이 니콜라이 1세에 대항해 데카브리스트 봉기를 일으킵니다.
- 반란이 진압된 후 푸슈킨 역시 연루 혐의를 받고 수사를 받게 되지만, 새 황제 니콜라이 1세의 배려로 석방됩니다.
- 니콜라이 1세는 푸슈킨을 궁정 시인으로 임명하고 검열관을 직접 맡는 파격을 보입니다.
- 창작의 전성기:
- 황제의 비호 아래 푸슈킨은 창작의 자유를 누리며 「예브게니 오네긴」, 「스페이드 여왕」 등 걸작들을 연이어 발표합니다.
- 1830년대는 푸슈킨 문학의 황금기로, 시와 산문을 넘나들며 러시아 문학의 지평을 넓힌 시기였습니다.
- 특히 「예브게니 오네긴」은 당대 러시아 사회와 젊은이들의 정신세계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걸작으로 평가받습니다.
- 궁정에서의 불안과 방황:
- 시인으로서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지만, 귀족 사회에 묶인 푸슈킨의 내면은 불안으로 가득 찼습니다.
- 아내 나탈리야의 외도와 궁정에서 겪은 멸시는 푸슈킨을 더욱 괴롭혔습니다.
- 격렬했던 삶의 시간을 뒤로 하고, 푸슈킨은 1836년 가을 페테르부르크 교외에 별장을 얻어 한적한 생활을 시도하지만 번민의 시간이었습니다.
4. 비극적 결투, 그리고 영원한 청년 시인으로
- 생의 마지막 결투:
- 1837년 겨울, 푸슈킨은 아내와 외도 관계에 있던 귀족 장교 당테스와 결투를 벌이게 됩니다.
- 1837년 1월 27일, 페테르부르크 교외 블랙리버 근처에서 두 사람은 결투에 임했습니다.
- 권총 결투 끝에 당테스는 부상을 입었고, 푸슈킨은 배를 관통하는 치명상을 입게 됩니다.
- 시인의 죽음과 추모 열기:
- 1837년 1월 29일, 제37년의 짧은 생을 마감한 푸슈킨은 마지막 순간에 「넬슨의 죽음」을 읊조리다가 눈을 감았습니다.
- 러시아 문단과 지식인들은 물론 일반 대중들까지 푸슈킨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 그의 생전 친구였던 시인 레르몬토프는 「시인의 죽음」이라는 시를 지어 푸슈킨을 추모했습니다.
- 불멸의 시인으로 남다:
- 3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시인 푸슈킨, 하지만 그의 시는 세월을 뛰어넘어 사랑받고 있습니다.
- 푸슈킨 탄생 200주년, 사망 100주년 등 러시아에서는 푸슈킨을 기리는 기념행사가 끊이질 않습니다.
- 그의 묘소가 있는 스뱌토고르스크 수도원은 시인을 사랑하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문학 성지가 되었습니다.
푸슈킨은 러시아 문학 하늘의 영원한 태양으로 남아 있습니다. 천재적인 언어 감각으로 러시아어의 아름다움을 꽃피운 시성이자, 러시아의 정신과 감성을 노래한 서정시의 왕자. 푸슈킨의 시는 차르 시대는 물론 혁명 이후에도 러시아인의 가슴을 울리는 위대한 문학 유산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아프리카계 혈통의 후예, 황제의 총애를 받은 궁정시인, 불같은 연인, 비극적 최후를 맞은 결투가. 다채로운 삶의 여정 자체가 마치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다웠던 푸슈킨. 강요된 궁정 생활 속에서도 영혼의 자유를 노래했던 저항적 시인이기도 했지요.
지금도 푸슈킨의 시는 수많은 러시아인들의 가슴에 '시인의 나라'를 그려주고 있을 것입니다. 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자유의 시인, 알렉산드르 푸슈킨. 영원한 청년으로 기억되는 그의 이름은 러시아 문학의 푯대로 길이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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