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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항로 개척과 대항해 시대 (15-16세기)

OPYEB 2024.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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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항로 개척의 배경


- 향신료를 찾아서:
    - 12-13세기 십자군전쟁 이후 동방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후추, 계피 등 향신료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습니다. 
    - 당시 향신료는 음식의 맛을 내고 보존하는 데 필수적일 뿐 아니라, 약재나 염료로도 쓰이며 사치품으로 인식되었죠.
    - 그러나 실크로드를 통한 육상 무역은 비용이 높고 이슬람세력의 통제로 제한되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 지리지식의 확대와 항해술의 발전:
    - 14-15세기에는 이슬람권과의 교류로 그리스·로마 시대의 지리지식이 유럽에 유입되었습니다.
    - 톨레미의 세계지도가 번역되어 널리 유포되면서 지구가 둥글다는 인식이 확산되었죠.
    - 나침반, 천문표, 항해용 시계 등 항해기술이 발달하면서 원양항해 여건도 점차 무르익어 갔습니다.
- 유럽 열강의 해외팽창 욕구:
    - 15-16세기 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민족국가들이 대외팽창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 영국은 모직물 산업을 기반으로, 프랑스는 절대왕정 체제를 바탕으로 국력을 신장시켰죠.    
    - 무어인을 축출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장기간 전쟁을 치른 기사 계층을 해외로 돌려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2.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항로 개척


- 엔리케 왕자와 사가레스 항해학교:
    -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자는 아프리카 항로 개척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 그는 사가레스 곶에 항해학교를 세워 항해사, 선원, 조선기술자들을 체계적으로 양성했죠.
    - 천문학, 지도제작, 선박 제조 등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 아프리카 황금을 찾아서:
    - 1434년 북아프리카의 카나리아 제도, 아소르스 제도가 발견되었고, 이어 마데이라 제도, 카보베르데 제도 등이 탐험되었습니다. 
    - 이들 도서들은 이후 아프리카 항로 개척의 전진기지가 되었죠.
    - 1441년에는 누누 트리스탕이 아프리카 황금해안에 도달하여 금가루를 가져옴으로써 사하라 횡단로를 대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희망봉을 돌다:
    - 1487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인도항로 개척을 위해 대서양을 남하, 아프리카 최남단의 희망봉을 발견했습니다.
    - 인도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나 선원들의 반발로 결국 귀환할 수밖에 없었죠.  
    - 그럼에도 아프리카 대륙을 일주할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고, 인도항로 개척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습니다.
 
 


3.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스페인의 아메리카 진출


- 콜럼버스의 항해와 아메리카 도착: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횡단해 서쪽으로 향하면 인도에 이를 수 있으리라 확신했습니다.
    - 포르투갈에서 거절당한 뒤 스페인 여왕 이사벨라의 후원을 얻어 1492년 항해에 나섰죠.
    - 그해 10월 산살바도르섬에 도착한 뒤 쿠바, 아이티 등을 탐험했으나 인도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 새로운 대륙의 발견과 아메리카의 명명:
    - 콜럼버스는 1493년 귀국하여 스페인 여왕에게 새 땅을 발견했음을 보고했습니다.
    - 2차 항해에서는 자메이카, 푸에르토리코를 탐험했고, 3차 항해에서는 오리노코강 유역까지 이르렀죠.
    - 1507년 발표된 지도에서는 "아메리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했습니다. 항해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죠.
- 스페인의 식민제국 건설:
    - 스페인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식민지를 건설해나갔습니다. 
    -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는 멕시코의 아스테카 제국을, 1533년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잉카제국을 정복했죠.
    - 아메리카의 광대한 영토는 에스파냐(스페인령), 누에바에스파냐(멕시코) 등 부왕령으로 편제되고, 막대한 금과 은이 유입되었습니다.
 



4. 다 가마의 인도항로 개척과 포르투갈의 동방 진출


- 바스코 다 가마, 인도에 이르다:
    - 1497년 바스코 다 가마는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진출, 이듬해 인도 칼리컷에 도착했습니다.
    - 아랍 상인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현지 통치자와 조약을 맺고 향신료를 구매하는데 성공했죠.
    - 다 가마의 인도 항해는 동방과 서방을 잇는 획기적 사건이었습니다. 
- 동방 무역의 주도권 장악:
    - 포르투갈은 인도양 각지에 무역기지를 세워 동방 무역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 1510년 알부케르키는 오르무즈를 점령해 페르시아만을, 1511년에는 말라카를 함락시켜 말루쿠 제도로 진출했죠. 
    - 아프리카 동해안의 모잠비크, 소팔라 등지에서는 금을 확보하고, 서아프리카에서는 노예무역을 주도했습니다.
- 동서양 무역의 요충, 고아:
    - 1510년 점령된 인도 서해안의 고아는 포르투갈 동방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했습니다. 
    - 고아 총독은 인도양 일대의 포르투갈령을 통치했고, 그곳에서 아시아산 향신료가 유럽으로 운송되었죠.
    - 이후 고아는 브라질에서 들여온 사탕수수 재배의 중심지이자 중계무역항으로 번영을 구가했습니다. 
 

  

5. 대항해 시대의 의의와 영향


- 세계 무역망의 형성과 교역범위의 확대:
    - 신항로 개척은 아메리카와 아시아를 잇는 대서양·인도양 무역망을 탄생시켰습니다. 
    - 유럽-아메리카-아시아를 오가는 삼각무역이 본격화되면서 교역량과 교역품목이 급증했죠.
    - 은이 유럽에서 아시아로, 향신료와 생사, 면직물 등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대량 유입되었습니다.
- 서양 열강의 해외 팽창과 식민지 건설:
    - 신항로 개척은 유럽 열강의 해외 팽창과 식민지 건설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아메리카와 아시아 일대에 식민 제국을 건설했고,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가 그 뒤를 이었죠.
    - 원주민의 학살과 약탈, 아프리카 노예무역 등 식민주의가 초래한 부정적 유산도 심각했습니다.
- 중상주의 경제와 자본주의 맹아:
    - 식민지 개척과 무역 확대는 유럽 각국에서 중상주의 경제정책을 촉발했습니다.
    - 무역흑자를 통해 국부를 늘리는 한편, 관세와 독점으로 자국 산업을 보호·육성하는 정책이 활발해졌죠.
    - 해외 교역을 매개로 상업자본이 축적되면서 근대 자본주의의 맹아가 움트기 시작했습니다. 
- 서구 중심적 세계관의 형성:
    -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은 유럽인들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사건이었습니다. 
    - 지리상의 발견은 곧 인식론적 전환으로 이어졌고, 유럽중심적인 근대 세계체제의 효시가 되었죠.
    - 타 문명에 대한 우월감을 바탕으로 서구사회의 가치와 제도를 이식하려는 문명화 사명감이 팽배해졌습니다.
 



결론


신항로 개척과 대항해 시대는 근대 세계사의 서막을 알리는 대전환점이었습니다. 유럽과 아메리카, 아시아를 잇는 대양 항로가 개척되면서 교역범위가 급격히 확대되었고, 이는 유럽 경제의 비약적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나아가 유럽 열강의 해외 팽창과 식민지 쟁탈전으로 이어진 대항해 시대의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세계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이는 엄청난 문명사적 충격과 모순을 낳았다는 점에서, 여전히 우리 앞에 놓인 숙제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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