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

베니토 무솔리니 (Benito Amilcare Andrea Mussolini, 1883-1945) -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운동을 이끈 독재자. '20세기의 불한당들'로 지칭되는 전체주의 지도자 중 하나.

OPYEB 2025. 1. 4.
반응형

베니토 무솔리니 (Benito Amilcare Andrea Mussolini, 1883-1945) -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운동을 이끈 독재자. '20세기의 불한당들'로 지칭되는 전체주의 지도자 중 하나.

1. 사회주의자에서 파시스트로

- 열렬한 사회주의자로 활동하다:
    - 1883년 7월 29일,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중부 로마냐 지방의 작은 마을 도비아에서 태어났다.
    - 아버지 알레산드로는 대장장이이자 사회주의 운동가였고, 어머니 로사 말테오니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무솔리니는 교사가 된 후에도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 가담한다.
    - 1910년대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사회당 소속으로 당 기관지의 편집장을 맡는 등 사회주의 투사로서 명성을 떨쳤다.
- 1차 대전 개입 찬성으로 사회당에서 제명되다:
    -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계기로 무솔리니의 입장은 급변한다.
    - 당시 무솔리니는 전쟁 반대 입장이었던 이탈리아 사회당의 공식 노선과 달리, 이탈리아의 전쟁 참여를 주장했다.
    - 그는 전쟁을 민족의 단결과 부흥을 가져올 기회라고 보았는데, 이는 민족주의로의 전환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 결국 무솔리니는 전쟁 참여 주장을 굽히지 않다가 1914년 11월 사회당에서 제명당한다.
- 제1차 대전 참전과 파시스트로의 변모:
    - 이탈리아가 연합국 측으로 전쟁에 참여하자, 무솔리니는 입대해 전선으로 향한다.
    - 전쟁 중 부상을 입은 그는 제대 후, 민족주의와 권위주의가 결합된 파시즘을 주창하기 시작한다.
    - 1919년 밀라노에서 전직 용사들을 중심으로 전투단(Fascio)을 조직하고, 좌파 세력과 충돌을 빚었다.
    - 파시스트 운동은 붉은 셔츠를 상징으로 내세웠고, 폭력을 통한 정권 장악을 공공연히 내세웠다.

2. '검은 셔츠단'의 로마 진군과 권력 장악

- 전후 경제위기와 파시스트의 약진:
    - 1차 대전 후 이탈리아는 전비 지출로 경제가 피폐해졌고, 실업과 인플레이션이 만연했다.
    - 이런 혼란한 정국을 배경으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운동은 급속히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 1921년 총선에서 파시스트당은 35석을 차지했고, 무솔리니는 당수가 되었다.
    - 1922년 10월, 파시스트 민병대 '검은 셔츠단'은 약 3만 명 규모로 불어났다.
- 수상 취임과 권력 장악:
    - 1922년 10월 27-28일 밤, 파시스트 민병대는 로마로 진군했다.
    - 당시 국왕 엠마누엘레 3세는 계엄령 선포를 거부하고, 무솔리니에게 내각 구성을 요청한다.
    - 이로써 무솔리니는 총리에 취임하고, 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 그러나 이듬해 6월, 사회당 의원 마테오티가 파시스트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는 파시스트의 독재 야욕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 야당 탄압과 일당 독재의 공식화:
    - 1924년 무솔리니는 의회 해산과 신임투표를 단행해 승리를 거둔다.
    - 이어 반대파 인사들을 강제 수용소에 가두고, 언론을 장악하는 등 독재체제 구축에 돌입한다.
    - 1926년에는 파시스트당 이외의 모든 정당을 불법화하고,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여 투옥한다.
    - 1929년 로마교황청과 라테라노 협약을 맺어 교회의 지지를 얻어내기도 했다.

3. 파시스트 독재체제 확립

- 전제적 권력 확립과 개인숭배 조장:
    - 무솔리니는 언론과 사법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을 자행했다.
    - 노조와 파업이 금지되었으며, 산업계는 파시스트당의 지시를 받는 협동조합 형태로 개편되었다.
    - 무솔리니 자신은 두체(Il Duce)라 불리며 신격화되었고, 개인숭배 바람이 사회 전반을 휩쓸었다.
    - 파시스트 정권은 문화와 교육 전반을 장악했고, 프로파간다를 통해 국민을 세뇌했다.
- 교육과 사회 통제:
    - 파시스트 정권은 교육 제도를 완전히 장악하여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조직화, 군사화했다.
    - 교과서는 파시즘 이데올로기로 철저히 채색되었고, 교사들은 파시스트당의 간섭을 받았다.
    - 발릴라 소년단, 파시스트 청년단 등을 통해 어릴 때부터 파시즘 정신을 주입했다.
    - 파시스트당은 가족주의를 내세워 여성을 집안에 묶어두고, 다산을 장려했다.
- 로마 중심의 대외 팽창주의:
    -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로마 제국의 영광을 내세우며 대외 팽창에 나섰다.
    - 1935년 에티오피아를 침공해 식민지로 삼았고, 1936년에는 에스파냐 내전에 개입했다.
    - 1937년에는 반공 군사동맹인 독일, 일본과 방공협정(추축국)을 맺고 세력을 확장했다.
    - 1939년 4월 알바니아를 합병하고, 1940년 6월에는 이집트 침공을 감행한다.

4. 2차 대전의 참전과 실각

- 독일의 동맹국으로 2차 대전 참전:
    - 무솔리니는 오랜 동맹국인 나치 독일과 함께 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었다.
    - 1940년 6월 10일, 그는 "단지 몇 천 명의 죽음"만으로도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자신했다.
    - 그러나 무솔리니의 판단은 크나큰 오산이었고, 이탈리아군은 그리스 전선에서부터 고전을 면치 못했다.
    -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도 영국군의 반격으로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에서 패퇴했다.
- 연합군의 시칠리아 상륙과 강제 실각:
    - 1943년 7월 연합군이 시칠리아 섬에 상륙작전을 감행하자 이탈리아 전역에서 반파시스트 시위가 들불처럼 번졌다.
    - 7월 25일 파시스트 대평의회는 무솔리니에 대한 불신임안을 가결했고, 무솔리니는 국왕에 의해 해임되었다.
    - 무솔리니는 체포되어 그란 사소 산의 별장에 연금되었다.
    - 9월 8일 바돌리오 새 내각은 연합국과 휴전하고 독일과 단교했다.
- 무솔리니 해방과 이탈리아 사회공화국 수립:
    - 그러나 독일군은 무솔리니를 탈출시켜 북부의 산악 지대로 데려갔다.
    - 무솔리니는 독일군 엄호 아래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살로 공화국)을 수립하고, 명목상의 수반이 되었다.
    - 그러나 이 괴뢰정권은 이탈리아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연합군에 맞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 결국 1945년 4월 연합군의 최후공세로 살로 공화국은 무너졌고, 독일군도 항복했다.

5. 처형과 사후

- 무솔리니의 처형:
    - 독일군이 항복하자 무솔리니는 스위스로 도피를 시도했다.
    - 1945년 4월 27일, 무솔리니 일행은 코모 호수 인근의 마을에서 이탈리아 공산 파르티잔에게 체포되었다.
    - 4월 28일 오후, 파르티잔은 무솔리니와 그의 정부였던 클라라 페타치를 처형했다.
    - 이들의 시신은 밀라노의 로레토 광장에 거꾸로 매달려 군중들의 야유와 조롱거리가 되었다.
- 파시즘의 종말:
    - 무솔리니의 몰락으로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권은 종말을 고했다.
    - 그러나 무솔리니는 독일의 히틀러, 스페인의 프랑코와 함께 전체주의 정권의 대명사로 기억되고 있다.
    - 파시즘이 남긴 독재와 전쟁, 학살의 참화는 유럽 근현대사의 비극으로 기록되었다.
    - 오늘날에도 무솔리니를 추종하는 신파시스트 세력들이 존재하지만, 주류에서는 격리되어 있다.

 

 

독재자 무솔리니가 남긴 정치적 유산은 매우 부정적이다. 파시즘의 광기와 전쟁의 참화를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안겨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다만 젊은 시절 무솔리니의 행보는, 제1차 대전 이후 유럽의 정치지형이 어떻게 극단적 민족주의와 전체주의로 빠져들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읽힐 수 있다. 오늘날 무솔리니가 남긴 교훈은 민주주의와 다원주의의 가치를 수호하라는 것이리라.

반응형

댓글

💲 추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