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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퀴리 (Marie Curie, 1867-1934) - 폴란드 출신의 프랑스 과학자, 노벨상 2회 수상자

OPYEB 2024.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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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퀴리 (Marie Curie, 1867-1934) - 폴란드 출신의 프랑스 과학자, 노벨상 2회 수상자


1. 폴란드에서의 유년기와 청년기

- 바르샤바에서의 성장기:
    - 마리 퀴리는 1867년 11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습니다.
    - 본명은 마리아 살로메아 스크워도프스카(Maria Salomea Skłodowska)였습니다.
    - 아버지 블라디스와프는 수학, 물리 교사였고, 어머니 브로니스와바는 여학교 교장이었습니다.
- 바르샤바 대학 진학의 좌절:
    -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지배 아래 있었고, 여성들은 대학 진학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 마리아는 야간에 열리는 비밀 초급 대학인 '공중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 사회학 등을 공부했습니다.
    - 정식 대학 과정을 밟고 싶었던 마리아는 누나 브로니아와의 약속대로 파리행을 결심하게 됩니다.


2. 파리 유학시절

- 소르본 대학 입학:
    - 1891년 마리아는 24세의 나이로 파리에 도착해 소르본 대학에 입학합니다.
    - 그녀는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하며 눈부신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 1893년에는 물리학 석사 학위를, 이듬해에는 수학 석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 피에르 퀴리와의 만남과 결혼:
    - 1894년 마리아는 에콜 뮈니시팔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던 피에르 퀴리를 만나게 됩니다.
    - 두 사람은 서로의 학문적 재능과 열정에 이끌려 연인이 되었고, 1895년 7월 결혼에 이릅니다.
    - 마리아는 피에르와의 결혼을 계기로 마리 퀴리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됩니다.


3. 방사능 연구와 신원소 발견

- 우라늄 광석의 방사능 연구:
    - 1896년 마리 퀴리는 남편 피에르와 함께 우라늄 광석인 핏치블렌드의 방사능을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 그들은 우라늄보다 훨씬 강한 방사능을 방출하는 미지의 물질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 퀴리 부부는 그 물질을 분리해내기 위해 수년간 지독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 폴로늄과 라듐의 발견:
    - 1898년 퀴리 부부는 우라늄 광석에서 새로운 방사성 원소 폴로늄을 분리해냈습니다.
    - 폴로늄은 마리 퀴리의 모국 폴란드를 기려 명명된 것입니다.
    - 같은 해 12월, 그들은 라듐이라는 또 다른 신원소를 발견하는 쾌거를 이룹니다.
- 노벨 물리학상 수상:
    - 1903년 퀴리 부부는 방사능 현상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합니다.
    - 마리 퀴리는 여성으로는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가 되었습니다.
    - 노벨상 수상으로 마리 퀴리는 유럽 과학계의 슈퍼스타로 부상하게 됩니다.


4. 비극과 재기

- 피에르 퀴리의 사고사:
    - 1906년 4월 19일, 피에르 퀴리는 말굽에 머리를 짓밟혀 46세의 나이로 요절합니다.
    - 남편의 죽음은 마리 퀴리에게 있어 인생 최대의 악몽이자 시련이었습니다.
    - 그러나 그녀는 슬픔을 잘 추스르고 남편의 뒤를 이어 소르본 대학의 물리학과 교수가 됩니다.
- 두 번째 노벨상 수상:
    - 1911년 마리 퀴리는 라듐의 순수 단리에 성공하고, 라듐의 성질을 밝혀냈습니다.
    - 방사능 연구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마리 퀴리에게 노벨 화학상이 주어집니다.
    - 이로써 마리 퀴리는 노벨상을 두 차례나 수상한 최초의 과학자로 기록되게 됩니다.


5. 제1차 세계대전과 만년

- 방사선 차량의 개발:
    -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마리 퀴리는 야전병원에 엑스선 진단 장비를 제공하는 활동에 뛰어듭니다.
    - 그녀는 직접 트럭에 엑스선 장비를 설치해 부상병들을 진료하는 '작은 퀴리'들을 양성했습니다.
    - 이 엑스레이 차량들은 '퀴리의 작은 것들'이라 불리며 야전 의료에 혁신을 가져왔습니다.
- 라듐 연구소 설립:
    - 전쟁이 끝난 뒤 마리 퀴리는 라듐 연구와 방사선 치료법 연구에 매진합니다.
    - 1914년 파리에 라듐 연구소를 설립한 그녀는 방사선 치료의 선구자로 활약했습니다.
    - 오늘날 파리의 퀴리 연구소는 방사능과 방사선 의학 분야의 세계적 연구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 투병 생활과 사망:
    - 1920년대 후반 마리 퀴리는 평생 방사능에 노출된 탓에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 1934년 7월 4일 마리 퀴리는 악성 빈혈로 타계합니다. 향년 66세였습니다.
    - 1995년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의 유해는 파리 팡테옹으로 옮겨져 안치되었습니다.


마리 퀴리는 여성으로서, 이민자로서, 과학자로서 삼중고를 겪으며 희대의 업적을 이룬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방사능이라는 자연현상을 발견하고 새로운 원소를 발견해낸 그녀의 연구는 현대 물리학과 화학의 지평을 열어젖힌 혁명적 성과였습니다. 두 차례나 노벨상을 수상한 최초의 과학자로서 그녀가 세운 금자탑은 오늘날까지도 빛나고 있습니다. 평생 연구와 교육, 후학 양성에 헌신한 마리 퀴리의 학덕은 과학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역경을 딛고 학문의 정상에 오른 한 여성의 삶 자체가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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