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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 무역과 아프리카 노예무역 (15-19세기)

OPYEB 2024.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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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서양 무역의 배경과 전개


- 아프리카-아메리카-유럽을 잇는 삼각무역:
    - 대서양을 무대로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을 잇는 삼각무역이 형성되었습니다. 
    - 유럽에서 아프리카로는 면직물, 철제품, 주류 등이,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는 노예가,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는 설탕, 담배, 면화 등이 거래되었죠.
    - 이 거대한 무역망을 통해 막대한 부가 유럽으로 집중되었고, 이는 서유럽의 자본주의 발전에 토대가 되었습니다.
- 설탕 플랜테이션과 노예 노동:  
    - 대서양 무역을 촉발한 것은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설탕 생산이었습니다. 
    - 포르투갈은 브라질 북동부 지역에서,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는 카리브해 섬들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했죠.
    - 원주민 인구가 감소하자 아프리카에서 대량의 노예를 끌어와 플랜테이션에 투입했습니다.
- 중상주의 무역 정책과 경쟁:
    - 유럽 각국은 중상주의 무역 정책을 펴며 식민지 개척과 해외시장 선점에 열을 올렸습니다. 
    - 무역 흑자를 통해 국부를 증대시키려 한 것이죠.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이어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가 치열하게 경쟁했습니다.
    - 대서양을 두고 벌어진 패권 쟁탈전은 17-18세기 유럽의 군사적, 경제적 역학관계를 규정했습니다.
- 신항로 개척과 유럽 경제의 번영:
    - 아메리카 대륙 발견과 희망봉 발견으로 대서양 항로가 개척되면서 유럽 경제는 활력을 얻었습니다.
    -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를 잇는 신항로는 은을 비롯한 귀금속과 각종 상품의 대량 유통을 가능케 했죠.  
    - 상업 도시, 무역 중개항, 금융 중심지로서 암스테르담, 런던, 리스본 등 도시가 발달하고, 유럽 경제가 호황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2. 아프리카 노예무역의 실태


- 노예 사냥과 중개:
    - 15세기 중반,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 서해안 지역에서 노예사냥을 시작했습니다. 
    - 이후 유럽 상인들은 현지 추장과 제휴하여 노예를 확보하는 방식을 발전시켰죠.
    - 건조한 내륙 사하라 사막 지역에서는 아랍 상인과 유럽 상인이 노예사냥과 중개 거래에 관여했습니다.
- 노예 수송의 참상:
    - 노예선은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캄비아, 앙골라 등 '노예해안' 지역에 정박해 노예를 선적했습니다.
    - 그들은 좁은 선창에 질식할 듯 실려 대서양을 건너야만 했죠. '중간항로'로 불리는 이 항해는 최소 한 달, 길게는 두 달 이상 소요되었습니다.
    - 항해 중 악조건으로 인해 사망하는 노예들이 속출했고, 병들거나 반항하는 이들은 바다에 내던져지곤 했습니다.
- 플랜테이션의 노예 생활:
    - 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에 도착한 노예들은 가축과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았습니다. 
    - 그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혹사당했고, 굶주림과 채찍질, 성폭력에 시달렸죠.
    - 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높았고, 평균 수명은 7-8년에 불과했습니다.  
- 노예 인구의 급증과 인종차별:
    - 노예무역의 급성장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흑인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 18세기 중반에 이르면 카리브 해 지역의 흑인 인구는 백인 인구를 훨씬 상회했습니다. 
    - 인종에 따른 계급구조와 차별이 고착화되었고, 백인 지배층의 우월주의가 심화되었죠.

 

 


3. 노예무역이 아프리카에 끼친 영향


- 인구 유출과 노동력 약탈:
    - 3세기 반에 걸쳐 약 1,200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아메리카 대륙에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 장년층 남성이 주로 포획됨에 따라 각 지역사회는 심각한 인구 유출과 노동력 손실을 겪었습니다. 
    - 아프리카 대륙 전체로는 1억 명에 이르는 인구 감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 전통사회의 해체:
    - 노예 사냥이 극성을 부리면서 기존의 씨족·부족 공동체가 무너지고 전쟁과 약탈이 만연했습니다.
    - 노예가 주요 교역품이 되면서 전통적 경제구조, 물물교환 관행 등도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 전통문화가 단절되고 전승되지 못하는 등 문화적 피해도 상당했습니다.
- 부족 간 분쟁과 내전 조장:
    - 백인들이 부추긴 부족 간 분쟁은 대규모 내전으로 비화했고, 아프리카 사회를 혼란에 빠트렸습니다.
    - 노예 거래를 통해 부를 축적한 협력 세력은 백인의 지원 아래 토호 세력으로 발돋움했습니다. 
    - 내부 갈등과 분열로 인해 아프리카의 자생적 발전은 크게 저해되었습니다.
- 아프리카관의 왜곡과 인종주의:
    - 노예무역은 유럽인들의 아프리카관을 심각하게 왜곡했습니다. 
    - 그들은 아프리카인을 열등하고 야만적인 존재로 폄훼하며 인종주의적 편견을 강화했습니다.
    - 백인 우월주의에 입각한 서구 중심적 세계관의 뿌리에는 노예무역의 경험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4. 노예무역 반대 운동과 폐지


- 반노예제 운동의 태동:
    - 18세기 중반 이후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노예제와 노예무역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 계몽사상의 진전, 인권의식의 성장과 더불어 기독교 인도주의 정신도 abolition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죠.
    - 노예 출신의 올라우다 에키아노를 비롯해 토머스 클락슨, 윌버포스 등이 노예무역 폐지를 위해 분투했습니다.
- 영국의 노예무역 폐지:
    - 영국에서는 1807년 노예무역 폐지법이 제정되었습니다. 노예무역에 관여하는 영국 상인과 선박은 처벌 대상이 되었죠.
    - 이는 산업자본이 상업자본에 우위를 점하는 과정에서 노동력 재생산 방식의 전환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 1833년에는 노예제 전면 폐지법이 통과되어, 영국령 전역의 노예 80만 명이 해방되었습니다.
- 노예무역의 세계사적 폐지 과정:
    - 영국에 이어 다른 유럽 국가들도 노예무역 폐지에 동참했습니다. 
    - 1794년 프랑스, 1814년 네덜란드, 1820년 스페인, 1826년 포르투갈 등이 노예무역을 법적으로 금지했죠.
    -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을 거치며 1865년 노예제가 전면 폐지되었고, 브라질에서는 1888년에야 노예제가 폐지되었습니다.

 

 


5. 결론


대서양 노예무역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폭력의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무려 1,200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강제로 고향을 떠나 비인간적 대우 속에 신대륙으로 팔려갔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생명이 바다에 수장되었습니다. 
노예무역은 서구 열강의 자본 축적과 자본주의 발전에 결정적 토대가 되었지만, 피지배 민중에게는 그야말로 악몽과도 같은 체험이었습니다. 300여년에 걸친 노예 사냥과 강제 이주는 아프리카 대륙의 전통사회를 무너뜨리고 자생적 발전의 토대를 허물어버렸습니다.
피지배자들의 삶을 철저히 외면한 채 경제적 이득을 최우선한 노예무역의 역사는 식민주의의 잔혹성과 폭력성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서구가 주도한 근대화의 이면에는 인종주의와 비인간화, 약탈과 수탈의 어두운 민낯이 도사리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노예무역 반대 운동과 노예제 폐지는 인간 해방을 향한 역사의 진보라는 차원에서 주목할 만한 성취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노예무역이 남긴 후유증을 완전히 치유해주지는 못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에 만연한 빈곤과 정치적 혼란, 서방 사회에 잔존하는 인종차별의 문제는 노예무역의 유산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서양 노예무역의 역사는 우리에게 경제적 이익 추구와 보편적 인권 보장 사이의 긴장, 문명의 진보와 폭력의 상관관계에 대해 깊이 성찰할 것을 요구합니다. 과거의 과오를 직시하고 반성하는 일, 그것은 보다 정의롭고 포용적인 미래를 열어가는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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