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1948-1994) - 인종차별 정책의 심화와 저항 운동의 확산

OPYEB 2024. 8. 20.
반응형

1.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수립과 법제화

- 아프리카너 민족주의와 국민당의 집권:
    - 1910년 남아프리카 연방 수립 후 영국인과 아프리카너 간 갈등이 지속되었습니다.
    - 1948년 선거에서 아프리카너 민족주의를 내세운 국민당이 승리하며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시작되었습니다.
- 인종 분류법과 인종 격리 정책:
    - 1950년 인구등록법에 따라 모든 국민을 백인, 흑인, 컬러드, 아시아인으로 분류하였습니다.
    - 이를 기반으로 거주 지역, 대중교통, 공공시설 이용, 직업, 교육 등에서 인종 격리 정책이 시행되었습니다.
    - 특히 1953년 말 정주법(Bantu Homelands Act)을 통해 흑인을 위한 '호메랜드' 제도가 도입되면서 강제 이주가 감행되었습니다.  
- 정치·사회적 권리의 박탈과 탄압:
    - 이 시기 남아공 정부는 다양한 법률을 통해 흑인과 컬러드의 정치·사회적 권리를 박탈했습니다.
    - 1951년 별도대표법은 컬러드를 백인과 분리된 선거인단으로 구성하였고, 1956년 정치적대표법으로 흑인은 의회 내 대표성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 또한 1960년대에는 테러방지법 등 보안법규가 대폭 강화되어 인종차별 반대 운동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습니다.



2.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흑인 민권 운동의 전개

-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평화 저항운동:
    - 1912년 창립된 흑인 정치단체 ANC는 당초 청원과 합법적 시위를 통해 민권 쟁취를 추진했습니다.
    - 1952년 '법률 불복종 운동', 1955년 '자유헌장' 채택 등으로 저항 의지를 내보였지만 대세를 바꾸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 샤프빌 학살과 무장투쟁 노선으로의 선회:
    - 1960년 3월 경찰의 발포로 69명이 사망하고 180명이 부상당한 샤프빌 학살 사건은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 이를 계기로 ANC가 무장 투쟁 노선으로 선회했고, 넬슨 만델라를 중심으로 군사조직 움콘토 위 시즈웨(민족의 창)가 결성되었습니다.
    - 이들은 정부 기반시설 파괴, 게릴라전 등의 방식으로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저항했습니다.
- 흑인의식운동의 대두:
    - 1960-70년대에는 스티브 비코로 대표되는 흑인 지식인들의 '흑인의식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 이는 아프리카 문화와 정체성에 대한 긍정, 인종적 자부심 고취 등을 통해 흑인 민족주의를 고양하려는 문화운동이었습니다.
    - 1976년 소웨토 봉기를 이끈 학생 운동의 사상적 토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3. 국제사회의 개입과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의 확산  

- 유엔과 국제기구의 제재 활동:
    - 1960년대부터 유엔은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를 '인류에 대한 범죄'로 규정하고 대대적 규탄에 나섰습니다.
    - 1962년에는 유엔총회 결의로 남아공 정부에 대한 무기 금수 조치가, 1977년에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로 남아공에 대한 무기 금수 의무화가 이뤄졌습니다.
    - 스포츠 제재로는 1964년 도쿄올림픽, 1968년 멕시코시티올림픽 등에서 남아공이 출전 금지를 당했고, 1970년에는 크리켓 국제경기 출전도 금지되었습니다.
- 서방 진영과 국제 시민사회의 반아파르트헤이트 연대:
    - 1980년대 들어 영국, 미국 등 서방 국가 시민사회에서 남아공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 특히 대학가를 중심으로 남아공 상품 불매운동, 투자 철회 운동 등이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 또한 문화·예술계에서는 남아공 공연 보이콧과 반아파르트헤이트 콘서트 개최 등 국제연대 활동이 이어졌습니다.
- 서구 국가들의 경제제재 동참:
    - 1980년대 중반부터는 서구 국가들도 남아공에 대한 경제제재에 동참하기 시작했습니다.
    - 1985년 영국과 미국은 금융제재에 들어갔고, 1986년 유럽공동체(EC)와 일본은 철강, 철광석에 대한 수입금지 조치를 취했습니다.
    - 다국적기업들 또한 남아공 현지법인 매각과 투자 철수에 나섰습니다.



4. 데클러크 정권의 등장과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 데클러크의 개혁조치 단행:
    - 1989년 9월 취임한 데클러크 대통령은 당선 직후 "근본적 개혁이 불가피하다"며 개혁 의지를 천명했습니다.
    - 그는 1990년 2월 넬슨 만델라를 석방하고, ANC 등 흑인 정치조직에 대한 금지령을 해제했습니다.
    - 또한 인종차별법들을 속속 폐지하고 흑백 협상을 통한 헌법 개정을 추진했습니다.
- 헌법 개정과 아파르트헤이트의 공식 폐지:
    - 1991년 6월 정부와 ANC 간 협상 끝에 모든 인종차별법 철폐가 합의되었습니다.
    - 1993년 11월 새 헌법이 제정되어 평등권 보장, 흑인의 참정권 부여 등이 명문화되었습니다.
    - 드디어 1994년 4월 모든 인종이 참여한 총선이 실시되어 만델라가 이끄는 ANC가 압승을 거두었고, 아파르트헤이트는 공식 종식되었습니다.



5. 포스트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남아공 사회

- 인종간 화해와 진실 규명을 위한 노력:
    - 만델라 정부는 1995년 '진실화해위원회'를 구성하여 아파르트헤이트 시기 인권침해 사건의 진상 규명에 나섰습니다.
    - 이 과정에서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가해자의 사과가 이어졌고, 인종간 화해의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
- 사회경제적 불평등 해소의 과제:
    -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의 유산인 인종간 경제력 격차, 실업, 범죄 등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공 사회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 특히 흑인 빈곤층의 삶의 질 개선이 더딘 가운데, 급진 좌파의 불만도 고조되는 상황입니다.
- '무지개 국가'를 향한 도전:
    -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 남아공은 인종간 조화로운 '무지개 국가'를 지향하며 통합을 모색해 왔습니다.
    - 그러나 경제 불평등 해소, 부정부패 척결, 정치 발전 등 풀어야 할 숙제가 여전히 많습니다.
    - 만델라가 남긴 화해와 상생의 유산을 계승하며, 남아공은 다인종 민주주의의 성공 모델을 향해 분투하고 있습니다.  



6. 결론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은 인종차별이 법과 제도로 고착화된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극단적 사례였습니다. 백인 소수 정권은 유색인종 다수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권리를 원천 봉쇄하고, 이에 저항하는 흑인들에게는 가혹한 국가폭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러나 가장 암울한 시기에도 흑인 민권 운동은 좌절하지 않고 인종평등의 기치를 내걸고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ANC를 위시한 흑인 정치조직들은 평화적 방식에서 무장투쟁까지 다양한 저항 레퍼토리를 구사하며 차별 철폐의 길을 열어젖혔습니다.

특히 1980년대 국제사회의 반아파르트헤이트 연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서방 시민사회와 국가들이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경제제재에 가담하면서, 남아공 정권은 내외의 압박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데클러크의 개혁 드라이브와 만델라로 대표되는 흑인 지도자들의 통 큰 화해 정신이 만나 마침내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와 민주화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파르트헤이트의 후유증을 씻어내는 것은 결코 하루아침의 일이 아닙니다. 관습화된 차별 의식과 구조화된 불평등은 여전히 남아공 사회에 깊게 뿌리내려 있으며, 정치, 경제 개혁도 난관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공이 걸어온 길은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교훈을 줍니다. 그것은 차별과 불평등에 맞서 용기 있게 싸워야 한다는 것, 대화와 타협을 통해 평화로운 공존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국제사회의 연대가 부당한 체제를 변화시키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도 잘 보여줍니다.

남아공이 인종 갈등의 아픈 역사를 딛고 진정한 '무지개 국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하지만 우리는 남아공 국민들이 만델라의 정신을 이어받아 자유, 평등, 관용의 오색 깃발을 높이 들고 전진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 길이 남아공만의 길이 아니라, 갈등과 혐오를 넘어 상생을 모색하는 인류 보편의 길임을 기억하며 지지와 연대의 손길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반응형

댓글

💲 추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