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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전쟁과 사담 후세인 정권의 몰락 (1990-1991) - 새로운 중동 질서의 태동

OPYEB 2024.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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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과 전쟁 발발 배경

-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이라크의 경제적 어려움:
    - 8년간의 이란과의 전쟁으로 이라크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고, 전후 복구에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습니다.
    - 특히 전쟁 중 막대한 차관을 제공한 쿠웨이트에 대한 채무 부담이 컸습니다.
- 이라크의 쿠웨이트 영유권 주장:
    - 사담 후세인은 역사적으로 쿠웨이트가 이라크의 일부였다고 주장하며 영유권을 주장했습니다.
    - 또한 쿠웨이트가 중립지대 룸라일라 유전에서 석유를 불법 채굴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 국제유가 하락과 OPEC 감산 갈등:
    - 1980년대 후반 국제유가가 하락하면서 산유국들의 재정난이 가중되었습니다.
    - 이라크는 쿠웨이트 등 걸프국가들이 OPEC 감산 규정을 어기고 증산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 미국의 대이라크 정책 오판:
    - 당시 미국은 이란을 견제할 역내 세력으로 이라크를 중시했기에, 사담 후세인 정권을 어느 정도 용인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 이에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 병합에 대한 미국의 반응이 제한적일 것이라 오판했습니다.



2. 이라크군의 쿠웨이트 점령과 국제사회의 대응

- 이라크군의 기습 남침:
    - 1990년 8월 2일 10만여 명의 이라크군이 쿠웨이트로 진격했습니다.
    - 쿠웨이트군은 약 2만 명 수준으로 이라크군에 속수무책 당했고, 단기간에 쿠웨이트 대부분이 점령당했습니다.
- 유엔 안보리의 대이라크 제재:
    - 유엔은 즉각 안보리 결의 660호를 채택해 이라크의 즉각 철수와 무조건 복귀를 요구했습니다.
    - 이후 무력 사용 권한을 부여하는 결의안 678호까지 12차례에 걸쳐 강도 높은 대이라크 제재 결의를 채택했습니다.
- 다국적군의 구성:
    - 미국 주도로 쿠웨이트 해방을 위한 다국적군이 구성되었습니다.
    - 영국, 프랑스, 이집트,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등 35개국이 연합군에 병력을 파견했습니다.
- 전쟁 돌입 전 외교적 해법 모색:
    - 전쟁 발발 전 국제사회는 평화적 해법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 소련은 중재안을 내놓았고, UN사무총장도 바그다드를 방문해 사담 후세인을 설득했으나 결렬되었습니다.  



3. 걸프전쟁(사막의 폭풍 작전)의 전개

- 공습 작전 개시:
    - 1991년 1월 17일, 다국적군은 이라크와 쿠웨이트 점령 지역에 대한 대대적 공습을 개시했습니다.  
    - 5주 간의 공습 작전으로 이라크군 지휘부와 방공망, 군사 기지 등이 마비되었습니다.
- 지상군 작전 돌입:
    - 2월 24일, 다국적군 지상군은 이라크군이 구축한 3중 방어선을 돌파하고 쿠웨이트로 진격했습니다.
    - 사우디-쿠웨이트 국경의 커피팟 작전, 이라크 남부 바스라에서의 전차전 등 격전이 펼쳐졌습니다.
- 이라크군의 패주와 쿠웨이트 해방:
    - 4일간의 지상전 끝에 이라크군은 패주하기 시작했고, 쿠웨이트 시가 해방되었습니다.
    - 2월 28일, 부시 대통령은 전쟁 종료를 선언했습니다. 이라크는 국제사회의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밝혔습니다.



4. 걸프전쟁의 결과와 영향

- 사담 후세인 정권의 존속:
    - 이라크군은 크게 타격을 입었지만, 사담 후세인 정권은 존속했습니다.
    - 연합군은 바그다드 진격을 멈추고, 이라크 내정 불간섭 원칙을 고수했기 때문입니다.
-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WMD) 폐기 문제:
    - 전후 유엔은 이라크의 WMD 폐기를 감시하기 위해 유엔특별위원회(UNSCOM)를 설치했습니다.
    - 그러나 이라크의 비협조로 사찰단 활동은 번번이 좌절되었고, 이는 이후 미국의 이라크 재침공 명분이 되었습니다.
- 쿠르드족 탄압과 국제사회 개입:
    - 사담 후세인은 전쟁 직후 쿠르드족 탄압에 나서 대규모 난민사태를 야기했습니다.
    - 유엔은 이라크 북부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해 쿠르드족을 보호했습니다.
- 중동 역학구도의 변화:
    - 전쟁으로 이라크의 역내 위상은 큰 타격을 받은 반면, 사우디, 쿠웨이트 등 걸프국가들의 영향력이 커졌습니다.
    - 또한 시리아의 연합군 참전으로 아랍 국가들 간 결속이 과시되기도 했습니다.



5. 걸프전 이후의 중동정세 변화

- 오슬로 평화협정 체결:
    - 전쟁 이후 마련된 마드리드 평화회의를 계기로 중동평화 프로세스가 탄력을 받았습니다.
    - 그 결과 1993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오슬로 협정이 체결되어 상호 승인이 이뤄졌습니다.
- 중동 주둔 미군의 장기화:
    - 전쟁 이후 미군은 사우디와 쿠웨이트, 카타르 등에 군사기지를 유지했습니다.
    - 이는 역내 친미 정권 유지와 이란 견제를 위한 것이었으나,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의 빌미가 되기도 했습니다.
- 9.11 테러와 테러와의 전쟁:
    - 2001년 발생한 9.11 테러는 중동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개시했고, 이는 이후 이라크전, IS와의 전쟁으로 이어지며 미국의 중동 개입이 장기화되었습니다.
- 2003년 이라크전쟁 발발:
    -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의 WMD 개발과 테러 지원을 이유로 2003년 이라크를 재침공했습니다.
    - 사담 후세인 정권은 붕괴되었으나, 이라크는 내전과 정치적 혼란에 빠졌습니다.



6. 결론

걸프전은 냉전 종식 직후 새로운 국제질서 형성을 예고한 사건이었습니다. 유엔의 승인 아래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이 이라크의 명백한 침략행위를 응징한 것은 일견 국제법 질서의 승리로 보였습니다. 나아가 전후 마련된 중동평화 프로세스는 역내의 평화 정착을 기대케 했습니다.

그러나 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걸프전은 중동 문제의 평화적 해법을 위한 초석을 마련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전범(戰犯)으로서 사담 후세인과 그 정권에 대한 단죄는 이뤄지지 않았고, 오히려 전후 이라크에서는 쿠르드족 학살이 자행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미군의 역내 장기주둔은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의 반미 정서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고, 결국 9.11 테러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았습니다. 미국의 아프간, 이라크 전쟁 개입은 결국 중동에 더 큰 혼란과 재앙을 가져왔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걸프전의 교훈을 되새겨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무력은 문제 해결의 첫 수단이 되어선 안 됩니다. 평화는 당사자들 간의 대화와 타협, 인내와 노력으로 쌓아올려야 합니다. 국제사회가 이 같은 평화의 원칙을 이라크에, 나아가 중동 전역에 뿌리내리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할 때입니다.

아울러 걸프전은 자원민족주의와 영토분쟁, 종파 갈등, 민족 정체성 등 중동 문제의 복합성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이기도 합니다. 중동의 평화를 위해서는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대한 깊은 성찰 위에서 근본적 처방을 모색하는 한편, 역내 국가들의 주도적 역할과 국제사회의 건설적 역할이 균형을 이뤄야 할 것입니다. 걸프전 이후 30여 년, 중동은 여전히 평화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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