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장기 내전 (1979-1989) - 소련 몰락의 전주곡

OPYEB 2024. 8. 21.
반응형

1. 소련의 침공 배경

-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불안정:
    - 1970년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무함마드 다우드 칸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지만, 정국 혼란이 지속되었습니다.
    - 1978년 인민민주당(PDPA)이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하면서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 이슬람 반정부 세력의 대두:
    - 그러나 인민민주당 정권은 이슬람 전통을 무시한 채 급진적 사회개혁을 추진하면서 국민들의 반발에 직면했습니다.
    - 이에 대해 이슬람 무자헤딘 게릴라들이 반정부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 소련의 동맹국 지원 명분:
    - 반정부 세력에 맞서 고전하던 인민민주당 정권은 소련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 이에 소련은 '동맹국 지원'을 명분으로 아프간 침공을 감행했습니다.



2. 소련군의 군사작전과 한계

- 초기 전투와 수도 장악:
    - 1979년 12월 24일,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에 침공을 개시했습니다.
    - 2만 5천여 명의 소련군이 투입되어 수도 카불을 장악하고 아민 대통령을 살해했습니다.
    - 소련은 카르말을 새 대통령에 앉히고 괴뢰정권을 수립했습니다.
- 게릴라전과 소련군의 劣勢:
    - 그러나 아프간 전역에서 무자헤딘 게릴라들의 저항에 직면한 소련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 산악지대에 익숙지 않은 소련군은 지형적 약점을 노출했고, 유격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 장기전 돌입과 소련의 딜레마:
    -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소련군의 피해와 전비 부담이 가중되었습니다.
    - 국내외의 반전 여론이 비등해지자 소련 지도부는 출구전략을 모색해야만 했습니다.
    - 그러나 무자헤딘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 채 철수할 경우 동맹국을 잃고 국제적 위신에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3. 미국과 서방의 무자헤딘 지원

- 카터 행정부의 대소련 견제:
    - 미국은 소련의 아프간 침공을 강력히 비난하며 대소련 압박에 나섰습니다.
    - 카터 행정부는 무자헤딘에 대한 비밀 군사원조를 승인했습니다.
    -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을 주도하는 등 반소 정책을 폈습니다.
- 레이건 행정부의 본격 지원:
    - 1981년 출범한 레이건 행정부는 아프간 문제를 반소 정책의 주요 고리로 삼았습니다.
    - CIA를 통해 무자헤딘에 대한 스팅어 미사일 등 첨단무기 제공이 이뤄졌습니다.
    - 파키스탄 등 주변국과 협력하여 무자헤딘 지원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 국제사회의 반소 연대:
    - 이슬람 국가들은 물론 서방 국가들도 대소련 견제 차원에서 무자헤딘 지원에 가담했습니다.
    - 중국 또한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를 설욕하려는 듯 아프간 문제에 관여했습니다.



4. 소련군의 철수와 아프간 내전

- 고르바초프의 신사고 외교:  
    - 1985년 등장한 고르바초프는 아프간 주둔이 소련에 막대한 부담이 되고 있음을 인식했습니다.
    - 그는 동서 화해를 모색하는 신사고 외교의 일환으로 아프간 철군을 결정했습니다.
- 제네바 협정과 소련군 철수:
    - 1988년 4월, 파키스탄 제네바에서 아프간-파키스탄 간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 협정에 따라 소련군은 단계적 철수에 들어갔고, 1989년 2월 최종 철수를 완료했습니다.
- 나지불라 정권과 내전 격화:
    - 소련군이 물러간 뒤에도 카르말의 후임인 나지불라 정권은 버텨보려 했습니다.
    - 그러나 무자헤딘의 공세가 거세지면서 정국은 더욱 불안해졌고, 내전은 심화일로를 걸었습니다.
    - 급기야 1992년 나지불라 정권이 붕괴되면서 아프간은 수년간 군벌 간 권력 투쟁,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의 발호 등 혼돈에 빠졌습니다.



5. 아프간 전쟁의 영향과 교훈

- 소련 체제 동요의 결정적 계기:
    - 아프간 전쟁의 장기화와 막대한 전비 지출은 소련 경제에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 아프간 참전 군인들의 귀환 후 사회 부적응, 아편중독 문제 등이 소련 사회를 뒤흔들었습니다.  
    - 소련 지도부의 아프간 정책 실패는 공산당 1당 지배에 정통성 위기를 초래했습니다.
    - 아프간 전쟁은 베트남전에서의 미국의 교훈을 되풀이한 소련의 과오로 평가됩니다.
- 탈냉전과 새로운 분쟁의 출현:
    - 아프간 전쟁은 냉전 종식의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이는 미소 양극체제의 해체를 예고했습니다.
    - 하지만 탈냉전 이후 민족, 종교 갈등에 기인한 새로운 분쟁이 세계 도처에서 발발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 이슬람 원리주의의 태동과 9.11:
    - 아프간 전쟁을 거치며 이슬람 원리주의 네트워크가 형성되었습니다. 알카에다의 전신이 여기서 자라났습니다.
    - 서방의 지원을 받은 무자헤딘의 저명 지도자 오사마 빈라덴은 이후 테러리즘의 악명 높은 수괴가 되었습니다.
    - 9.11 테러의 뿌리가 소련-아프간 전쟁에서 비롯되었다는 분석도 설득력 있게 제기됩니다.



6. 결론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장기 내전은 냉전의 최후를 장식한 격동의 사건이었습니다. 체제 위기에 봉착한 소련 지도부의 모험주의적 오판이 빚은 참사는 소련 체제 붕괴의 도화선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울러 아프간 전쟁의 참화 속에서 키워진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은 9.11 테러와 ISIS의 출현 등 21세기 국제사회의 새로운 위협으로 부상했습니다.

오늘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목도하면서, 우리는 아프간 전쟁에서의 교훈을 다시 곱씹어봅니다. 군사력에 호소한 일방주의적 현상변경 시도가 얼마나 파국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강대국의 안이한 개입이 오히려 제어 불능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음을. 그리고 역설적으로 침략자의 안위마저 위태롭게 할 수 있음을 아프간 전쟁은 잘 말해줍니다.

과거를 성찰하지 않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습니다. 아프간의 비극은 지구상에서 전쟁과 분쟁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 모두가 직면할 수 있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오늘 우리에겐 이 같은 비극의 역사를 거울 삼아 평화와 공존의 대안을 함께 모색해야 할 절박한 시대적 책무가 놓여 있습니다. 다시는 '아프간'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대화와 협력의 지혜로 평화의 새 지평을 열어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아프간 전쟁의 참상에서 얻어야 할 역사적 교훈일 것입니다.

반응형

댓글

💲 추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