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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트마 간디 (Mahatma Gandhi, 1869-1948) - 인도의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비폭력 저항의 상징

OPYEB 2024.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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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트마 간디 (Mahatma Gandhi, 1869-1948) - 인도의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비폭력 저항의 상징


1. 어린 시절과 유학 생활

- 구자라트 출생:
    - 간디는 1869년 10월 2일, 인도 구자라트주의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습니다.
    - 아버지 카람찬드 간디는 포르반다르의 디완(총리)으로,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 간디는 주로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자이나교의 비폭력 원칙 또한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영국 유학:
    - 1888년 간디는 법률 공부를 위해 런던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 영국에서 간디는 서구 문화에 적응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점차 이를 수용하며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 이 시기 간디는 레오 톨스토이의 비폭력주의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불복종 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 1891년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간디는 인도로 돌아와 법률가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2. 남아프리카에서의 인권 운동

- 남아프리카 체류:
    - 1893년 간디는 인도계 이민자들의 법률 자문을 위해 남아프리카로 갔습니다.
    - 당시 남아프리카는 인종차별이 극심한 사회였고, 간디 또한 심각한 차별을 겪었습니다.
    - 특히 기차에서 1등석을 타고 있다가 백인 승객의 항의로 강제로 쫓겨난 사건은 간디의 인권 운동 시작에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 사티아그라하 운동:
    - 1906년 간디는 남아프리카 정부의 인종차별 법안에 반대하는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 사티아그라하는 '진리에 대한 불굴의 고수'를 뜻하는 것으로, 간디의 대표적 비폭력 저항 방식이 되었습니다.
    - 간디는 시위대를 이끌고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펼쳐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3. 인도 독립 운동의 지도자

- 인도 귀국과 비협조 운동:
    - 1915년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의 운동을 마무리하고 인도로 돌아왔습니다.
    - 그는 인도국민회의(INC) 지도부로 합류해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 나섰습니다.
    - 1920년대 간디는 영국 상품 불매, 세금 거부 등 대규모 비협조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 이 운동은 전 국민적 운동으로 발전하여 영국의 식민 통치를 심각하게 흔들었습니다.
    - 간디는 농촌 지역을 순회하며 민중과 직접 소통함으로써 독립 운동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 소금 행진:
    - 1930년 3월 12일, 간디는 영국의 소금세에 저항하는 '소금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 그는 24일 동안 400km가 넘는 거리를 걸어 바다에 이르러 소금을 직접 만들었습니다.
    - 이 행진으로 간디와 8만 명 이상의 시위대가 체포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영국 정부를 크게 당황시켰습니다.
    - 소금 행진은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의 위력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4. 영국과의 협상

- 라운드 테이블 회의 참가:
    - 1931년 간디는 영국 정부의 초청으로 런던에서 열린 라운드 테이블 회의에 참가했습니다.
    - 이 자리에서 간디는 인도의 완전한 독립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 그러나 간디는 이 회의를 통해 영국 여론의 지지를 얻는 한편, 세계적 지도자로 부상했습니다.
- 크리프스 선언과 반대:
    - 1942년 영국의 크리프스 선언은 전후 인도에 자치권을 부여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 그러나 간디는 이를 '폭력에 찬 평화'라며 거부했고, '브리튼 타도'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 이는 간디가 단순한 자치권 부여를 넘어 완전한 주권 회복을 목표로 했음을 보여줍니다.
    - 이 운동으로 간디는 다시 투옥되었고, 2년 뒤 건강 악화로 석방되었습니다.


5.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

- 종교 폭동과 분리 독립:
    - 1947년 영국의 인도 통치가 끝나자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간 유혈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 결국 인도는 힌두교 국가 인도와 이슬람교 국가 파키스탄으로 분리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 간디는 마지막까지 힌두-이슬람 간 화합을 위해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 이러한 분리 독립과 그에 따른 폭력 사태는 간디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 간디의 암살:
    - 1948년 1월 30일, 간디는 뉴델리에서 힌두교 극단주의자에 의해 저격당했습니다.
    - 암살범 고드세는 간디가 이슬람교도를 비호했다며 그를 적대시했던 인물이었습니다.
    - 간디의 장례식에는 수백만 명의 추모 행렬이 이어졌고, 인도는 국가적 지도자를 잃게 되었습니다.


6. 간디의 사상과 유산

- 비폭력 저항 사상:
    - 간디의 핵심 사상은 '아힘사(Ahimsa)', 즉 비폭력 정신입니다.
    - 간디는 억압과 불의에 저항할 때도 폭력이 아닌 평화적 수단을 써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 이는 마틴 루서 킹, 만델라 등 후대 지도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 사회개혁 노력:
    - 간디는 정치적 독립 외에도 인도 사회 개혁을 위해 힘썼습니다.
    - 그는 불가촉천민(하리잔) 차별 철폐, 여성 권익 신장, 근검절약과 생산적 노동 장려 등을 주창했습니다.
    - 특히 간디는 직접 물레를 돌리며 영국산 옷감 배척과 토산품 장려에 앞장섰습니다. 이는 영국의 경제적 착취에 저항하고 인도의 자립을 촉구하는 상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 간디의 유산:
    - 오늘날 간디는 평화와 자유, 사회정의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 유엔은 그의 탄신일인 10월 2일을 '세계 비폭력의 날'로 지정했습니다.
    - 간디의 삶과 철학은 지금도 전 세계 수많은 이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비폭력의 힘으로 영국 제국에 맞선 위대한 혁명가이자, 앞으로 나아갈 인류의 길을 제시한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마하트마'는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으로, 인도 국민들이 간디에게 붙인 존칭입니다. 그의 삶 자체가 진리와 사랑, 용기와 자비의 말씀이었던 셈입니다.

간디는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고자 기꺼이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그러나 폭력과 복수가 아닌 사티아그라하라는 평화적 방식으로 투쟁을 전개한 점이 간디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간디가 설파한 비폭력의 메시지는 인도를 넘어 전 세계 억압받는 이들의 투쟁에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인도 독립이라는 숙원을 이룬 후에도 간디는 영국에 대한 적개심을 떨쳐버리고 화해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힌두-이슬람 유혈 사태를 목도한 간디의 절규 또한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이는 정의와 평등을 위해 투쟁하되, 상대방의 인격과 존엄성마저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간디 평화사상의 정수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폭력과 억압, 증오와 차별이 만연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진리와 사랑의 힘을 믿었던 위대한 영혼, 간디의 삶을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내 삶 자체가 나의 메시지다"라는 간디의 명언처럼, 우리 각자가 일상 속에서 비폭력과 상생의 작은 실천을 이어간다면 어느 날 간디가 꿈꾸던 평화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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