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닉슨 (Richard Nixon, 1913-1994) - 미국의 제37대 대통령
1. 정치 입문과 초기 경력
- 퀘이커 교도 집안 출신:
- 닉슨은 1913년 1월 9일, 캘리포니아 요바 린다에서 태어났습니다.
- 그의 부모는 열심히 일하는 퀘이커 교도로, 닉슨에게 검소함과 근면함을 가르쳤습니다.
- 닉슨은 어려서부터 모범생으로 통했고, 후에 법조인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 하원의원 당선: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으로 복무한 닉슨은 전쟁 영웅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 1946년 공화당 간판으로 캘리포니아 제12선거구 하원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 당시 닉슨은 젊고 진취적인 보수 정치인으로 주목받았습니다.
- 상원의원 시절:
- 1950년, 닉슨은 캘리포니아 상원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습니다.
- 상원의원으로서 그는 반공주의 노선을 강하게 내세우며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 특히 알저 히스 스파이 사건 청문회에서 맹활약하며 전국적 스타로 부상했습니다.
2. 부통령 재임기
-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
- 1952년, 닉슨은 공화당 대선후보 아이젠하워 장군의 러닝메이트로 발탁되었습니다.
- 이는 닉슨의 젊고 진취적인 이미지가 아이젠하워 캠프에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 이들은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 슬러시 펀드 스캔들:
- 1952년 대선 직전, 닉슨의 정치자금 스캔들이 불거졌습니다.
- 이른바 '슬러시 펀드 스캔들'로, 닉슨이 캘리포니아 사업가들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습니다.
- 그러나 닉슨은 '체커스 연설'을 통해 위기를 모면했고, 결국 부통령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 부통령으로서의 활약:
- 닉슨은 8년간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보좌하며 충실한 부통령으로 활약했습니다.
- 그는 외교 문제에 깊숙이 관여했는데, 특히 라틴아메리카, 소련 등을 방문해 존재감을 과시했습니다.
- 냉전이 고조되던 시기, 소련의 흐루쇼프 서기장과도 '주방 설전'을 벌이며 강단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3. 1960년 대선 패배
- 케네디와의 접전:
- 1960년, 닉슨은 아이젠하워의 뒤를 이어 공화당 대선 후보로 나섰습니다.
- 그의 상대는 민주당의 젊은 스타 케네디 상원의원이었습니다.
- 둘의 접전 끝에 닉슨은 근소한 표차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 첫 TV 토론의 충격:
- 이 선거에서 닉슨 패배의 결정적 계기로 꼽히는 것이 바로 1차 TV 토론입니다.
- 라디오 청취자들은 닉슨의 답변에 높은 점수를 주었지만, 정작 TV로 보기에 닉슨은 파리하고 초조해 보였습니다.
- 반면 케네디는 젊고 활기찬 모습으로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 닉슨의 introspection:
- 대선 패배 후 닉슨은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캘리포니아로 돌아갔습니다.
- 그의 정치 인생 최대 위기였지만, 오히려 이 시기 동안 닉슨은 내적 성찰과 자기 혁신을 단행했습니다.
- 이는 훗날 그가 정상에 복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고 평가됩니다.
4. 제37대 대통령 당선
- 1968년 대선 승리:
- 1968년, 닉슨은 다시 공화당 대선 후보로 나서 민주당 후보 험프리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 당시 미국 사회는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 인종 폭동 등으로 큰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 닉슨은 '법과 질서' 공약을 내세우며 중도층과 보수층의 지지를 이끌어냈습니다.
- 닉슨 독트린의 천명:
- 취임 이후 닉슨 대통령은 '닉슨 독트린'이라 불리는 대외정책 기조를 천명했습니다.
- 이는 아시아 동맹국들의 자주 국방 능력을 제고하고, 미군의 해외 주둔을 줄이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 이에 따라 닉슨은 베트남에서의 '명예로운 철수'를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5. 업적과 유산
- 데탕트 외교:
- 닉슨 대통령은 미국과 공산 진영 간 긴장 완화를 위해 적극적인 데탕트 정책을 폈습니다.
- 1972년 닉슨은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 주석과 회담을 갖고 관계 개선의 물꼬를 텄습니다.
- 소련과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을 체결하는 등 평화 공존을 모색했습니다.
- 경제 정책:
- 닉슨은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스태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미국 경제를 되살리고자 노력했습니다.
- 임금·물가 동결, 달러와 금의 태환 중지 등 강력한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 그러나 이는 시장 기능을 억제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 워터게이트 사건:
- 1972년 닉슨은 압도적 표차로 재선에 성공했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곧 위기에 봉착합니다.
-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 도청 사건에 대한 닉슨의 연루와 은폐 시도가 드러나면서 탄핵 위기에 몰렸습니다.
- 결국 닉슨은 1974년 8월 9일, 사임 연설을 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습니다.
6. 퇴임 이후
- 포드 대통령의 사면:
- 닉슨의 후임인 포드 대통령은 취임 직후 닉슨에 대한 사면을 단행했습니다.
- 이는 워터게이트로 인한 국론 분열을 해소하고 국정에 전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 그러나 이는 '부패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특혜'라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 외교 활동:
- 사임 이후에도 닉슨은 왕성한 저술 활동과 외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 그는 소련, 중국 등을 방문하고 지도자들과 회견을 가졌습니다.
- 전직 대통령으로서 막후 외교관 역할을 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7. 평가와 유산
- 공과의 엇갈림:
- 닉슨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습니다.
- 그의 데탕트 외교, 중국과의 화해 등은 국제 평화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 반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한 도덕성 실추, 정적 감시 등 권력 남용 문제는 큰 과오로 꼽힙니다.
- 정치 유산:
- 닉슨은 공화당 우파를 결집시켜 이른바 '닉슨의 남부 전략'으로 정치 지형을 뒤흔들었습니다.
- 이는 남부 보수 백인층을 공화당으로 흡수하여 이념 균열 대신 인종 갈등 구도를 만들었다는 평가입니다.
- 이러한 유산은 이후 레이건의 당선, 공화당의 우경화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리처드 닉슨은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정치인 중 한 명입니다. 그의 경력은 화려한 성공과 치명적 실패가 교차하는 극적인 궤적을 그렸습니다. 당대 최고의 정치 실력자이자 냉전 지도자였던 닉슨은 결국 자신의 치부로 인해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닉슨이 남긴 유산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미국의 양당 정치는 물론, 국제 질서에도 닉슨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보수와 진보 진영 모두에게 닉슨은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이자 연구 주제로 남아 있습니다. 닉슨 스스로 회고록에서 밝혔듯, 그는 "결함 많은 위인(flawed giant)"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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