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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2세 (Felipe II, 1527-1598) - 스페인의 왕(재위 1556-1598). 가톨릭교회를 수호하고 스페인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절대군주. 반종교개혁 운동의 중심인물이자 무적함대로 잉글랜드 정복을 시도한 거인(巨人)

OPYEB 2024.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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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2세 (Felipe II, 1527-1598) - 스페인의 왕(재위 1556-1598). 가톨릭교회를 수호하고 스페인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절대군주. 반종교개혁 운동의 중심인물이자 무적함대로 잉글랜드 정복을 시도한 거인(巨人).


1.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계승자

- 카를로스 1세의 아들로 태어나다:
    - 1527년 5월 21일, 펠리페는 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와 포르투갈의 이사벨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 할아버지 펠리페 1세를 따라 펠리페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 태어날 때부터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 부르고뉴 공국의 계승자였던 펠리페는 엄격한 가톨릭 교육을 받았다.
- 우수한 자질과 총명함:
    - 펠리페는 라틴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여러 언어에 능통했으며 수학과 과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 정치와 종교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고, 검술과 승마 등 무예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 총명하면서도 무게감 있고 위엄 있는 태도로 신하들과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 마리아 왕후와의 결혼:
    - 1543년, 펠리페는 카를로스 1세가 정략적으로 정해준 포르투갈의 마리아 왕후와 결혼한다.
    - 마리아는 펠리페보다 2살 연상이었으며, 결혼 당시 이미 포르투갈의 왕위에 올라있었다.
    - 이 결혼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관계가 강화되었고, 이베리아 반도의 안정에 기여했다.


2. 반종교개혁 정책과 교회 수호

- 가톨릭교회의 충실한 보호자:
    - 펠리페는 가톨릭 신앙에 깊이 귀의한 군주였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아버지와 달리 교황권을 존중했다.
    - 가톨릭 국가들의 맹주로서 펠리페는 종교개혁으로 위기에 처한 로마교회를 보호하고자 했다.
    - 이단심문과 종교재판을 통해 국내의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탄압하고, 해외에서는 개신교 국가들과 대립했다.
- 네덜란드 반란과 레판토 해전:
    - 1566년, 펠리페의 네덜란드에서 칼뱅파들의 도상 파괴 사건을 계기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 '레판토 해전'(1571년)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함대를 격파하고 지중해에서의 패권을 확고히 했다.
    - 이 승리로 가톨릭교회를 수호한 영웅으로 칭송받았지만,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국력이 소진되기도 했다.
- 무적함대와 반 프로테스탄트 정책의 좌절:
    - 1588년, 펠리페는 개신교 국가 잉글랜드를 정복하기 위해 무적함대를 출항시켰다.
    - 그러나 프랜시스 드레이크 함대의 맹공과 악천후로 인해 함대는 큰 피해를 입고 패배하고 말았다.
    - 30년 전쟁 와중에 펠리페의 조카 페르디난트 2세가 체코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는 성공했지만(1620), 스페인 왕실의 독일 지배는 실패로 끝났다.


3. 문화예술 발전과 식민 제국 경영

- 엘 에스코리알 궁전의 건설:
    - 펠리페는 마드리드 근교에 규모가 웅장한 엘 에스코리알 궁전을 건설했다.
    - 1563년에 착공해 1584년에 완공된 이 건축물은 스페인 르네상스 건축의 최고봉으로 평가된다.
    - 수도원과 왕궁이 결합된 형태의 이 건물은 펠리페가 추구한 절대주의 국가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예술의 후원자:
    - 펠리페 시대에는 미술, 음악, 문학 등 문화예술이 크게 발전했다.
    - 궁정화가로 벨라스케스와 엘 그레코를 등용했고, 음악가 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를 후원했다.
    -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비롯해 황금세기를 대표하는 문학 작품들이 탄생했다.
- 신대륙 식민지 경영:
    - 펠리페는 중남미 식민지에서 막대한 양의 은과 금을 수탈했다.
    - 포토시 은광, 사카테카스 은광 등 굴지의 광산을 통제하며 재정 기반을 다졌다.
    - 그러나 식민지 원주민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와 횡포도 서슴지 않았다.
    - 영국의 프랜시스 드레이크에 의한 식민지 약탈, 잉글랜드와의 전쟁 패배 등 해외 영토를 지키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4. 절대주의 정치의 정점

- 중앙집권적 관료제 확립:
    - 펠리페는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화를 추구했다.
    - 관료제를 확대하고, 궁정과 지방에 대한 왕의 통제력을 강화했다.
    - 카스티야 평의회를 중심으로 한 의회 권한을 약화시키고, 국왕의 자문 기구로 국무회의를 두었다.
- 에스코리알 궁전에서의 은둔 통치:
    - 펠리페는 에스코리알 궁전에 칩거하며 외부와의 접촉을 제한했다.
    - 방대한 양의 국정 문서를 직접 검토했으며, 신하들을 궁전으로 불러 업무를 보고하게 했다.
    - 고독한 군주의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꼼꼼하고 성실한 통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 왕위 계승과 스페인 황금시대의 막내림:
    - 펠리페의 첫째 부인 마리아는 1545년 아들 카를로스를 낳았으나, 정신질환을 앓던 카를로스는 1568년 왕의 명으로 옥사했다.
    - 막내아들 카를로스(훗날 펠리페 3세)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펠리페는 1598년 9월 13일 71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 펠리페의 사후 스페인 제국은 급속도로 쇠퇴해 갔고, 스페인 황금시대의 막이 내렸다.


가톨릭교회 보호의 수호자이자 스페인 제국을 정점으로 이끈 절대군주. 펠리페 2세는 르네상스 시대의 전형적인 강력한 통치자였습니다.

반종교개혁 정책과 이단 탄압, 식민지 수탈 등 근대적 관점에서 볼 때 비판받을 만한 점이 많습니다만, 당대의 기준으로는 시대정신을 체화한 리더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페인 제국의 발호는 결국 과도한 팽창이 불러온 자가당착이었지만, 펠리페 치세 절정기의 부강함 자체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엘 에스코리알 궁전으로 대표되는 문화적 번영, 일당백 무적함대로 상징되는 군사적 위용은 펠리페 시대를 스페인 황금기로 만든 원동력이었죠.

펠리페는 왕좌에 앉은 신의 대리인이자, 스페인 민족의 영광을 체현한 인물이었습니다. 엄격하고 고독한 군주의 삶 속에서도 백성과 신앙, 제국에 대한 열정만큼은 불같이 타올랐던 절대왕정의 시대. 펠리페 2세의 생애는 곧 스페인 제국 황금기의 명암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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