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1929-1993) - 영국 출신의 배우이자 유니세프 친선대사 '로마의 휴일', '티파니에서 아침을'로 유명한 20세기 최고의 여배우 중 한 명
1.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운 유년기
- 비극적인 가정사:
- 오드리 헵번은 1929년 5월 4일 벨기에 브뤼셀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 아버지 조셉 빅터 러스톤은 영국계 은행가였고, 어머니 엘라 반 헤므스트라는 네덜란드 남작의 딸이었습니다.
- 그러나 아버지는 나치에 동조하며 가정을 버렸고, 어머니는 홀로 딸을 키우며 좌절과 방황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 전쟁의 공포:
-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헵번 가족은 네덜란드 아른헴으로 이주합니다.
- 그러나 독일군의 침공으로 전쟁의 참화를 고스란히 겪어야 했습니다.
- 나치의 점령 아래 굶주림과 공포의 나날을 보내야 했던 어린 오드리에게 전쟁의 기억은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게 됩니다.
- 발레리나의 꿈:
- 발레를 사랑했던 오드리는 전쟁 중에도 발레 수업을 놓지 않았습니다.
- 전쟁으로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린 오드리의 키는 고작 170cm였지만 재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 그녀는 전쟁이 끝나면 반드시 발레리나가 되리라 다짐했지만, 키가 작은 탓에 결국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2. '로마의 휴일'과 할리우드 데뷔
- 춤에서 연기로:
- 발레리나의 꿈이 좌절된 오드리는 연기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 1948년 영화 '네덜란드 여인'의 코러스 걸 역할로 데뷔한 그녀는 이후 연극 무대를 오가며 연기력을 쌓습니다.
- 브로드웨이 무대에 오른 오드리의 재능을 알아본 프랑스의 명감독 윌리엄 와일러는 '로마의 휴일' 여주인공 역을 그녀에게 제안합니다.
- 꿈의 무대 할리우드:
- 1953년 개봉된 '로마의 휴일'은 오드리 헵번을 단숨에 스타덤에 올려놓았습니다.
- 공주 역할을 사랑스럽고 발랄하게 소화한 오드리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할리우드 최고의 여배우로 등극합니다.
- 특유의 가녀린 체구, 긴 목, 큰 눈은 이후 '헵번 룩'이라는 하나의 아이콘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 명품 배우로서의 입지:
- 할리우드 데뷔 후 오드리 헵번은 '사브리나' '전쟁과 평화' 등의 작품에서도 주연을 맡으며 명실상부한 톱스타 반열에 올랐습니다.
- 1961년 '티파니에서 아침을'로 다시 한번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그녀는 우아함과 지성미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 1950-60년대 최고의 여배우로 군림했던 오드리 헵번. 그녀는 단순한 스타를 넘어 스크린의 여신으로 추앙받았습니다.
3. 사랑과 가정의 여정
- 첫 번째 결혼:
- 1954년 오드리는 배우이자 감독인 멜 페러와 결혼합니다.
- 이들은 1960년 아들 션을 얻으며 행복한 가정을 꾸렸습니다.
- 그러나 페러의 바람으로 결혼 생활은 파탄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1968년 두 사람은 이혼을 선언합니다.
- 운명적 사랑 안드레아 도티:
- 1969년 오드리는 이탈리아 정신과 의사 안드레아 도티와 재혼에 골인합니다.
- 18세 연상의 도티는 오드리에게 있어 진정한 인생의 반려자였다고 합니다.
- 1970년 아들 루카를 낳은 오드리는 연기 활동을 접고 13년간 은퇴 생활을 하게 됩니다.
4. 은퇴 후 유니세프 활동
- 어린이를 위한 헌신:
- 1980년대 중반 오드리 헵번은 제3세계 어린이들의 삶을 돕는 유니세프 활동에 전념하게 됩니다.
- 1988년 그녀는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임명되어 에티오피아, 수단 등 아프리카 곳곳을 방문하며 불우한 아이들을 위해 헌신합니다.
- 어린 시절의 고통을 잊지 않았던 오드리는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어린이"라며 전쟁고아들의 실상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 인도주의자로서의 삶:
- 유니세프 활동은 오드리의 삶에서 연기 못지않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 그녀는 자신의 명성을 활용해 기아와 질병으로 고통받는 어린이들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했습니다.
- "세상에는 배고픈 아이의 눈빛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없다"던 오드리. 그녀에게 있어 나눔은 삶의 진정한 기쁨이었습니다.
5. 영원한 별이 되다
- 투병 생활과 사망:
- 1992년 오드리는 대장암 판정을 받고 투병 생활에 들어갑니다.
- 발견이 늦어 암은 이미 전이된 상태였지만, 그녀는 고통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 1993년 1월 20일 스위스 토로카에서 오드리 헵번은 생을 마감합니다. 향년 63세.
- 20세기가 사랑한 여인:
- 우아함과 청순함, 강인함과 연약함을 동시에 지닌 배우. 오드리 헵번의 독보적인 매력은 스크린을 넘어 세대를 아우르는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 배우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완벽에 가까웠던 오드리 헵번. 세기의 디바이자 세기의 여인으로 기억되는 이유입니다.
- "내 삶이 특별한 건 운이 좋았기 때문이에요. 세상 모든 이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유니세프 활동 중 남긴 그녀의 이 말은 오드리 헵번이 우리에게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아요." 오드리 헵번이 남긴 이 말처럼 그녀의 미소는 영원히 우리 곁에 남아있습니다. 배우를 넘어 우아함의 아이콘이 된 여인. 스크린 안팎에서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이뤘던 삶. 오드리 헵번의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는 연기는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습니다.
물론 화려한 영화 인생 이면에는 전쟁의 상처와 결혼 생활의 좌절 등 개인적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녀 특유의 연약하면서도 강인한 이미지는 어쩌면 고난의 시간이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불우한 어린이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되어가지만, 오드리 헵번은 여전히 우리 곁에서 사랑받고 있습니다. 영화로, 사진으로, 그리고 수많은 회고록을 통해. 우리는 오드리라는 이름으로 아름다움과 사랑, 나눔의 가치를 떠올리게 됩니다. "진정한 친구는 당신의 손을 잡아주되, 영혼을 움켜쥐는 사람"이라던 그녀. 오드리의 삶은 우리 영혼을 따스하게 비추는 영원한 빛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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